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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온 편지
신부들의 세계 (1)


글 심탁 클레멘스 신부 |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교구 선교사목

5년차 선교 활동을 회고해 봅니다. 막상 선교를 지원하고도 저의 내면에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첫째, ‘서툰 프랑스어로 과연 소통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제일 앞섰습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나의 문화적 몰이해로 민폐를 끼친다든지 혹은 대구대교구에 누를 끼치지는 않을까?’라는 염려도 더해졌습니다.

 

선교 첫 해, 콜마르 성요셉본당 협력사제 및 파스터르병원 원목으로 발령났을 때 지역장 신부와 그의 측근들(유급 교리교사 및 청소년담당 교구 직원)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호기심과 호감이 공존하는 듯 보였습니다. 성요셉본당 주임신부는 19년간 병원 원목을 해오고 있어서 그의 2년차 본당 사목에서 배울 점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반면 복음 연구로 단련된 지역장 신부는 강론이나 대인 관계면에서 아주 탁월한 탈렌트를 가진 것 같았습니다. 덕분에 성요셉본당에서 청소년 밴드를 만든 후 주임신부와 달리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 주는 지역장 신부와 그 주변 인물들과도 빠르게 친해졌습니다.

 

 

 

선교 2년차, 본당 청소년 밴드를 만들고 지역 행사(첫 영성체, 신앙고백예식, 견진성사, 성모의 날 등)에 성가 봉사를 하면서 유명해진 덕분인지 본당에 채 정착도 하기 전에 가톨릭 주교좌 중·고등학교 교목신부겸 지역 청소년 담당 책임자로 발령이 났습니다. ‘학교 교목? 지역 청소년 담당 책임? 한국에서도 해 본 적이 없는데….’ 또다시 두려움이 생기게 됐고 신부들과의 본격적인 어려움도 이때부터 생겨났습니다. 당장 가장 큰 지지자였던 지역장 신부가 유급 교리교사와 이구동성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나섰습니다. 교목으로서 교구로부터 구체적 임무를 부여 받은 저에게 단계별 교리과정에 나오는 ‘신앙고백’과 ‘견진 성사’ 준비 교리반을 개설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선교 동기에 관심을 보이시던 종교교육담당 제2보좌 주교님은 직접 사제관에 찾아오셔서 개인적 대화도 나누고, 면담 과정에서 저에게 직접 업무분장을 해 주시며, “마치 본당의 주임신부처럼 자율적이고 창의적으로 모든 교리와 성사를 교내에서 진행하라.”고 임무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지역장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주교가 현장을 몰라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이건 뭐지? 담당 주교를 능가하는 저 자신감?’

진퇴양난. 고민 끝에 문제점을 담당 보좌주교님께 전화녹음과 메일로 보고를 드렸으나 답장이 없었습니다. 저는 청하지도 않았는데 당시 콜마르의 참사회 사제였던 성 마르땡본당 주임 토마 신부님께서 만남의 자리를 만드셨고, 청소년 교리 담당자와 지역장 신부와의 대화가 가능했습니다. 둘은 저를 협공하고, 저는 주교님과의 업무분장 문서를 들이밀고, 토마 신부님은 저쪽 두 사람을 진정시키셨습니다. 결국 교리반 개설은 하되 성 마르땡본당으로 귀속하는 것으로 합의를 하였습니다. 돌아보면 저는 방향 설정도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있었던 반면, 아마 여러 방법으로 상황진단을 하신 은퇴 직전의 고참 사제는 저의 입장에 배려를 해주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장 친했던 본토 신부는 자신의 명령을 듣는 그의 측근 유급 교사의 지휘 아래 저의 임무를 귀속시키려 했고 제가 설명을 요구했음에도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서먹한 분위기가 생겨났지만 저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친구 사이에도 교구 정책이나 정치에 대해 얼마든지 의견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교육분야 보좌주교님의 인사권과 업무분장 관련 장상의 지휘권을 무시하는 모습에 신뢰감을 크게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미사 집전 신부가 필요하면 저에게 지원 요청을 하곤 했습니다.

 

선교 3년차, 그러다 2018년 10월, 대구대교구 성모당 봉헌 100주년 행사에 새로 부임해 오신 스크라스부르 ‘뤽 라벨’ 대주교님을 모시고 열흘간 비서겸 통역관으로 수행했습니다. 다른 일행으로는 벨포르교구 도미니크 주교님 외 수행 비서들과 대구의 선교사 신부들이 함께했습니다. 저는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대주교님의 인간적인 면모에 푹 빠졌습니다. 하나씩 알게 되는 대주교님의 인생여정, 예를 들면 3대째 장군급 군인 가족, 프랑스 최고급 이공계 엔지니어 디플롬을 취득, 공수부대 공군 장교 8년, 수도회 장상, 군종교구 주교를 거쳐 마침내 스트라스부르 신참 대주교로 임명되신 것까지. 알자스에는 서로 신참이고 어떤 사심도 선입견도 없는 데다, 특히 대주교님의 지성과 호기심, 신앙과 복음의 틀 안에서 편하고 유쾌한 대화가 가능했고 일행 모두 함께 기도하고 식사하고…. 피곤했지만 전체적으로 의미있고 즐거웠습니다. 특히 박준용 신부의 경쾌한 센스와 스피드가 많은 부분을 수월하게 해주었습니다.

한국 방문 열흘 동안 대주교님은 보고 듣고 나누고 느낀 모든 것을 매일 밤마다 정리, 요약 보고서를 작성하셔서 스트라스부르교구 홈페이지에 올리셨습니다. 한국보다 8시간 늦은 프랑스에서는 아침마다 새로운 소식과 사진이 소개됐습니다. 교구에서는 일종의 센세이션이 일어났던가 봅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인간관계 문제는 그 다 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2018년 대림절, 프라도 피정에 참석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지역장과 친분이 있는 신부 두명이 저에게 “너 주교 임명 언제 되니?”라고 했고 저는 뭔가 잘못 들은 줄 알고 “뭐라고? 못 알아들었다.”고 하자, 그들은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냐?’ (…)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지만 기라성같은 신부들이 즐비한 이 교구에서 뭣하러 나같은 생초보 아시아 선교사한테 그런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문제는 그 표현의 배경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새로 임명되신 대주교님 가까이에서 열흘씩이나 같이 보낸 사람이 없었고(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귀국하신 다음에는 대주교님께서 교구 내 모든 알로꾸시오에서 한국 이야기, 특히 순교자들의 이야기와 한국 전체 수준(고속도로와 도시 형태)이 프랑스와 비슷하다는 점, 한국 신자들의 열정 등을 이야기하셨던 것입니다. 프랑스 교회가 새로운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순교정신이 교구에 필요하다거나, 이런 정신을 배우기 위해서는 대구대교구와의 인연이 중요하다거나, 거기에 클레망(저)이 경첩(연결고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등의 말씀을 글로 남기셨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자 어떤 신부는 노골적으로 “이제 한국 이야기 그만 듣고 싶다.”며 제가 알아 듣게끔 소리내어 말하기도 했습니다.

‘엥!’ 저는 그것도 모르고 “대주교님과의 여행이 어땠냐?”는 질문에 뤽 대주교님의 좋은 점들을 잔뜩 부풀려서 이야기했습니다. 예를 들면 진취적 비전, 열정, 다정, 즉흥적인 유머, 호기심, 결단력, 체력까지 넘치는 분이시라고요. 한편 대주교님의 첫 인상은 ‘차갑다’는 것이 이곳 신부들의 대체적인 평가였고 저 역시 처음에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런데 600명이 넘는 신부들 중에 그런 선입견을 뛰어넘는 극소수의 신부가 되었으니…. 게다가 한국 일정 중 이곳에 쏟아진 낯선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의 한류 분위기에다 일정 후 저의 철없는 자랑까지 보태졌으니…. 불평불만의 숯불 위에 질투의 기름을 쏟아부은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