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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면목(面目) 없는 날들


글 최성준 이냐시오 신부 | 월간〈빛〉 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우리는 가끔 ‘면목 없다.’라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면(面)’은 얼굴이고, ‘목(目)’은 눈이라는 뜻입니다. ‘얼굴’과 ‘눈’이라는 글자가 만나 “얼굴의 생김새”, “남을 대할 만한 체면”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된 것입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합니다. 눈을 쳐다보면 그 사람의 내면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속 생각이 그 사람의 눈을 통해 밖으로 드러난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얼굴’은 그 사람 전체를 대표하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 줍니다. 얼굴만 봐도 그 사람이 누군지, 내가 아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정면으로 얼굴을 찍은 증명사진은 우리의 전체 모습을 대표해서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내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얼굴을 알리려고 노력합니다. ‘얼굴 도장을 찍는다.’는 말 처럼 직접 대면(對面)해서 얼굴을 마주 봐야만 할 때가 많습니다. 이렇듯 얼굴은 그 사람의 전부를 나타냅니다.

반면에 사람은 부끄러운 행동을 하거나 죄를 지으면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숙입니다. ‘얼굴에 먹칠을 했다.’, ‘얼굴을 들 수가 없다.’라며 얼굴을 가립니다. 체면(體面)이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텔레비전 뉴스에 비칠 때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리려고 합니다. 부끄러워 자기 얼굴을 숨기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면목이 서지 않는 짓을 하고서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일러 ‘후안무치’라 하고 ‘철면피’라며 욕을 합니다. ‘후안무치(厚顔無恥)’는 얼굴이 두꺼워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고, ‘철면피(鐵面皮)’는 쇠로 만든 낯가죽이라는 뜻으로, 염치없고 뻔뻔스러운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얼굴’과 ‘눈’, 둘을 합친 글자 ‘면목(面目)’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뜻합니다. 잘못을 했거나 다른 이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 우리는 ‘면목 없습니다.’ 라며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감춥니다. 성경에서도 우리가 주님께 죄를 지었을 때 얼굴을 들어 하느님을 볼 수가 없으며,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서 당신의 얼굴을 감추십니다.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창세 4,7),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탈출 3,6), “저의 허물에서 당신 얼굴을 가리시고 저의 모든 죄를 지워 주소서.”(시편 51,11)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우리는 친구들과 만나 얼굴을 마주 보며 이야기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성당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웃고 떠들며 모임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요즘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하루 중 거의 대부분을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살고 있습니다. 그나마 눈은 내놓고서 서로의 눈만 바라봅니다. 코로나 시대에는 얼굴을 드러내는 게 오히려 예의가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도 얼굴을 가려야 하고,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얼굴을 가린 채 인사를 나누어야 합니다. 공공장소에서 얼굴을 드러내 놓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불편해하며 자리를 피하게 됩니다. 언제쯤 우리는 마스크를 벗고 얼굴과 얼굴을 서로 맞대고 바라보며,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요즘은 본의 아니게 서로 ‘면목(面目) 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뵐 수는 없지만 하느님의 나라가 오면 그분의 얼굴을 직접 뵐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날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묵시 22,4)

 

우리도 빨리 코로나 시대를 극복하고 서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수 있기를, 서로 면목(面目)을 가질 수 있기를, 그리하여 서로의 진면목(眞面目)을 알아볼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우리가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1코린 1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