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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골목신앙
내 귀에도 생쌀이 씹히는 소리가 들리는데 끝까지 드셨다.


글 이재근 레오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오늘 나는 15년의 사제생활 동안 겪었던 두 분의 대주교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첫 번째는 내가 사제서품을 받은 해에 있었던 일이다. 본당 발령을 받기 전, 첫 공식일정으로 그 당시 교구장님이셨던 이문희 대주교님과 함께 우리 동기들은 일본 나가사키 성지순례를 갔다. 해외로 나가는 것이 처음이었던 나는 모든 것이 너무나 설레었다. 피곤한 줄 모르고 성지순례를 했고 심지어 새벽 5시가 되면 개운하게 눈이 뜨이기까지 했다.

성지순례 마지막 날 아침, 그날도 어김없이 새벽 5시에 눈이 뜨였다. 평소에는 아침기도를 바치고 산책을 하며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지만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에 무언가 특별한 것을 하고 싶어졌다. 그 때 문득 떠오른 것이 새벽 목욕이었다. 나는 속옷을 챙겨서 목욕탕으로 향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사람만이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걸을 수 있는 것처럼 일찍 일어난 나는 목욕탕 첫물에 몸을 담그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내가 첫손님이 아니란 생각에 살짝 실망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이 대주교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군대에서는 모두 ‘수색’이라는 것을 배운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목표지점을 향해 이동하는 기술이다. 이 기술을 목욕탕에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소리가 나지 않게 뒤로 돌았고 목적지인 출입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내 기술은 완벽했다.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이미 대주교님께서 나를 보고 계셨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한 채 계속 나홀로 수색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내가 첫 주임신부로서의 소임을 하게 된 중국 광저우에서의 일이다. 4년간 그곳에 있었는데 임기 중에 공동체 설립 10주년 행사가 있었고 이때 현 교구장이신 조환길 대주교님께서 사목방문을 하셨다. 보통 해외에 있는 사제들을 방문하실 때 대주교님께서는 따로 호텔을 예약하지 않으시고 그곳 사제관에서 함께 머무신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잠시 동안 사제관을 없애기로 결심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광저우에는 사제관이 없는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대주교님과 한 집에서 잔다는 건 생각만 해도 불편했기에 어떻게 해서든 잠은 편안하게 자고 싶었다. 그래서 사목위원들에게 대주교님께서 먼 곳에서 오시는 만큼 편히 쉬실 수 있도록 누추한 사제관보다 호텔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사목위원들은 아무 걱정 말고 맡겨만 달라고 하셨다.

드디어 공동체 설립 10주년의 날이 밝았다. 대주교님께서 비서신부님과 함께 공항에 도착하셨고 그날 저녁까지 행사가 이어졌다. 이제 집으로 갈 시간이 되자 사목위원들은 대주교님과 비서신부님을 차로 모셨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호텔로 가시지 않고 사제관으로 이동하셨다. 사목위원들이 호텔을 알아본 것이 아니라 본당 사제관을 좋은 호텔처럼 꾸며놓았던 것이다. 평소에 사목위원들께 더 잘해드리지 못한 죗값을 받는 거라 생각한 나는 그래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는 헬렌 켈러의 말처럼 나는 최선을 다해 대주교님을 모시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하면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다음날 아침, 중국 심천으로 떠나시는 대주교님께 건강한 아침상을 대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반찬은 사목위원들이 냉장고 안에 준비해 두셨다고 하니 밥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다음 날 나가사키 성지순례 때처럼 새벽 5시에 최상의 컨디션으로 일어난 나는 정성스럽게 쌀과 잡곡을 씻고 전기밥솥의 스위치를 눌렀다. 밥이 지어지는 동안 신자들이 만들어 주신 반찬을 준비해서 식탁을 차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밥그릇에 밥을 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우리가 평소에 먹던 밥이 아니라 그냥 따뜻하게 데워진 생쌀이었다. 나는 잡곡밥을 할 때는 몇 시간 전부터 물에 불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행복의 다른 쪽 문마저 닫히는 순간이었다.…

밥을 한 숟가락 뜨시던 비서신부님이 말씀하셨다. “저는 라면이 먹고 싶습니다.” 나는 대주교님께도 라면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바라보았다. 그러나 먹을 만하다고 하시면서 계속 밥을 드셨다. 내 귀에도 생쌀이 씹히는 소리가 들리는데 대주교님께서는 끝까지 밥을 다 드셨다. 그리고 마지막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신부님.”이라고 하셨다.

 

신자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사제를 어른으로 생각해 주신다. 그러나 내 행동은 어른스럽지 않다. 오히려 어린아이처럼 더 손이 간다. 이 생활이 편하고 좋은 나는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성경 구절을 들먹이며 철없는 행동을 정당화한다. 갓 사제서품을 받고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던 나는 어른이 무서웠다. 목욕탕에서 만난 어른을 피해 다녔던 것처럼 말이다. 사제생활을 시작한 지 15년이 지난 나는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광저우에서 나의 생쌀밥을 맛있게 드셔 주시던 어른처럼 말이다.

우리는 저마다 누군가에게 어른이어야 한다. 비록 상대방이 나를 부담스러워 하고, 함께 있는 것을 불편해 할지라도 어른이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그 옛날 우리의 버팀목이 되어준 어른들처럼 이젠 우리가 그들의 버팀목이 되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른’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이 고민을 시작한 지금, 우리는 분명 어른이 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