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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평협 가정 선교 체험 공모전 소망상(우수상) 수상작
대부님의 빈자리, 지금도 그립습니다


글 백지숙 미카엘라 | 신평성당

2014년 봄 대부님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내 남편 미카엘의 대부님, 우리 부부에겐 아버지 같은 존재셨다. 해외 법인장으로 10년을 근무하시다가 우리 회사에 새로 오신 공장장님. 자상하고 항상 사원들을 ‘사람’으로 대해 주셨다. 휴식 시간에는 커피도 직접 타주시며 “수고한다. 고생한다.”는 위로도 해주시고 늘 부지런하셨다. 공장장님이라기보다 자상한 옆집 아저씨 같은 분이셨다. 주5일 근무가 아니던 때 늘 바빴던 회사는 주야 교대근무를 쉼 없이 했고 힘이 들었다. 그런데 새로 오신 공장장님이 토요일만 되면 출근해서 사원들을 한번 돌아보고는 “수고하세요.” 라는 인사만 남기고 퇴근하곤 하셨다. 주말이라 안 나오셔도 되는데 고생하는 사원들 힘내라고 다녀가신 것이다. 어느 토요일, 그날도 “수고하세요. 봉사하러 갑니다. 먼저 가서 미안합니다.” 라고 하시며 퇴근하셨고, 사원들은 “또 골프 치러 가시겠지.” 하고 놀렸다. 그때만 해도 그분의 정체가 궁금했고 그냥 가기 민망해서 봉사하러 간다고 하시는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손가락에 묵주반지를 끼고 계시는 걸 보게 되었고, “공장장님, 성당 다니세요?” 했더니 “네, 기회가 되면 같이 가요.” 하면서 묵주반지를 보이며 웃으셨다. 그 후로 현장 패트롤을 돌 때마다 난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고 도와주고 가시라고 하면서 도움을 받으며 동료들의 부러움도 샀다. 그때부터 친해지기 시작했고 당연한 듯 자주 도와주셨다.

그즈음 남편은 나에게 “성당 안 갈래? 같이 가자.” 하면서 5~6년을 조르면서 아내인 내가 같이 하기를 바라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나는 주야 2교대, 남편은 3교대 근무라 매일 서로 엇갈린 시간을 살고 있던 때라 시간 내서 성당 가기가 힘들다는 생각만 했었다. 마음은 있어도 갈 수 없는 그런 상황이라고만 생각하고 그렇게 긴 시간을 흘려버린 것이다.

그런데 운명이었는지 갈등만 하고 있을 즈음 공장장님을 만나게 되었고 우리 부부의 고민을 말씀드리게 되었다. 성당에 나가고 싶긴 한데 교리 받을 시간도 안 되고 제대로 다닐 수 있을지 몰라서, 그래서 감히 못 간다는 말에 공장장님은 “다 길이 있지요. 내가 한번 알아볼게요.” 하시고는 “주님이 부르는 시기가 있어요. 걱정 말아요.” 하셨다. 며칠 후 원장 수녀님께서 우리 부부를 한번 보고 싶어 하신다는 말을 전해주셨다. 남편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내가 먼저, 성당 갈 수 있으면 가자는 말을 꺼내고 공장장님이 알아봐 주셨다니 놀라기도 하면서 기뻐했다. 원장 수녀님과 약속한 날, 떨리기도 하고 긴장도 됐다. 성당도 처음 가보지만 수녀님을 가까이서 만나는 것도 처음이었다. 수녀님 말씀을 잘 듣고 고민도 털어놓았는데 교리 시간이 문제였다. 내가 12시간 맞교대 근무라서 저녁시간인 교리 수업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온 해결책이 야간 근무 시 오전 중에 혼자서 특별교리를 받게 해주시겠다고 원장 수녀님께서 배려해주셨다

남편은 다른 예비신자들과 교리를 들었고 가끔 나랑 같이 특별교리 수업을 듣기도 했다. 공장장님을 만나고 모든 일이 꿈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서서히 성당에 발을 내딛고 예비신자지만 주일미사에 참례하기도 했다. 교중미사를 못 가면 새벽미사, 저녁미사에 참례하며 주어진 시간에 감사하며 남편과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알았는데 공장장님은 우리 본당의 사회복지위원장을 맡고 계셨다. 그래서 주말만 되면 봉사하러 간다고 하셨고 성당뿐만 아니라 장애인복지관, 적십자회 등 많은 봉사활동을 하고 계셨고 늘 부지런하게 사신 분이셨다. 우리가 열심히 교리를 받고 있을 때 우리 부부를 위해 기도해주시고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셨다. “잘하려 하다 보면 지친다. 천천히 숨을 고르는 법도 필요하다.”고 하시면서 너무 욕심내지 말고 한 계단씩 오르라는 충고도 잊지 않으셨다.

교리를 마칠 즈음 세례를 받으려면 대부, 대모님을 정해야 하고 세례명도 정해야 한다고 하셨다. 남편과 난 고민 끝에 대천사인 ‘미카엘, 미카엘라’로 세례명을 정하고 이름처럼 선하게 살고 봉사하는 신앙인이 되자고 했다. 대부, 대모님으로 우리 부부는 당연히 공장장님 부부를 생각했다. 그러나 공장장님은 남편의 대부님이 되어주실 수 있지만 사모님은 시간이 안 되어 나의 대모가 되어줄 수가 없다고 하셨다. 대신 좋으신 분을 추천해주셔서 지금의 대모님을 만나게 되었다. 대모님은 자상하고 인정도 많으시고 본당에서 봉사도 많이 하는 분이시다. 남편의 대부님 고(故) 임병식 그레고리오, 나의 대모님 김경희 안젤라.

두 분을 대부, 대모님으로 모시고 2016년 4월 17일(내 생일이 4월 18일인데 미리 큰 선물을 받았다.) 드디어 세례를 받았다. 고운 한복을 입고 성당에 들어서니 대부, 대모님이 “축하한다. 환영한다.”고 하시며 같이 기뻐해 주셨고 많은 신자분들이 축하해주셨다. 세례식 때 우리 부부가 대표로 첫 예물봉헌을 드리게 되어 더 영광스러웠다. 대모님이 미사포를 씌워 주실 때는 너무 감격스러워 눈물이 났다. 미사포를 머리에 얹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돌아왔지만 남편에게도 감사했다. 묵묵히 기다리며 지켜봐 준 남편, 우리를 성당으로, 주님 품으로 이끌어주신 공장장님 아니 대부님께도 감사했다. 지금도 그날의 감동이 가슴 설레게 한다. 축가로 성가대에서 울려 퍼진 천상의 소리, 그 울림은 아직도 감동으로 남아있다. 이렇게 우리 부부의 첫발은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큰 은혜로 시작되었다.

남편과 대부님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대부, 대자 사이가 되어 서로를 잘 챙기고 따르게 되었다. 세례를 받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대부님이 계신 레지오 팀에 입단하여 활동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 성당에서는 부부를 위한 ‘혼인 갱신식’ 행사가 있었다. 우리 부부도 대부님 부부, 대모님 부부와 함께 혼인 갱신식에 참여했고 결혼식 이후 처음 가져보는 축복과 부부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부부라고 다 참여하는 게 아니라 원하는 부부만 하는 행사여서 더 의미가 있었다.

서서히 성당에 적응해 가면서 미사가 생활이 되어 갈 즈음 큰 위기가 찾아왔다. 남편이 지인의 소개로 땅을 샀는데 문제가 생겼다. 욕심이 과해서 생긴 일, 남편도 모르게 지인이 장난을 친 탓에 땅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너무 속상해서 남편 몰래 울기만 했다. 미친 듯이 주모경을 바치고, 매일 천 번씩 성모송을 바쳤다. 그래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고 성당에 가기 싫어지기도 했다. “기도해도 소용없고 하느님도 없다.”며 대부님께 울면서 전화했다. 그때마다 대부님은 울고 싶으면 울고 속상할 때 언제든지 전화하라고 위로해주셨다. 그러면서 미사를 한두 번 빠지기 시작하고, 기도도 안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고해성사도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체념 상태가 되어가고 있었고 남편이 성당에 가자 하면 “안 가. 혼자 가.” 하면서 퉁명스러운 대답으로 미사참례를 피했다. 그런 나를 보면서 대부님은 걱정보다는 “시간이 약이지.” 하시며 기다린다고 하셨다. “사는 게 우선이니 스트레스 받지 마라. 그러다가 냉담하게 된다.” 하시며 고해성사에 대한 부담도 덜어주셨다. 그 시간이 지나고 마음의 평화를 찾게 된 나는 다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기도의 의미도 알게 되었다. 주일이면 본당 성전 입구에서 주보를 건네며 “선교합시다.” 라며 신자들을 반겼고, 미사 때 대부님 옆자리는 늘 우리 부부의 자리였다. 대부님은 남편의 롤모델이 되었다.

2019년 10월 27일, 세례받은 지 3년 만에 견진성사를 받았다. 그때도 두 분의 대부, 대모님은 우리 부부의 대부모가 되어주셨다. 그날도 우리 부부는 주교님 앞에서 봉헌하는 은혜와 대표로 주교님과 축하 케이크 커팅도 했다. 축복이었다. 대부님은 혹시 다음에 누가 대부 자리를 부탁하면 대자 미카엘을 추천하겠다고 말하면서 남편을 믿는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날 남편의 뒤에 서 계시던 대부님의 얼굴에 걱정스러울 정도로 흑빛이 돌았고 어디 편찮으시냐고 물으니 괜찮다고 하셨다.

그 후 일주일 뒤인 11월 4일, 대부님이 서울의 병원에 계시다고 전화가 왔고 “금방 내려갈 테니 기도 많이 해 주세요.” 하고는 한 달 동안 병원에 계셨다. 결과는 간암이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왜 하필 저 좋은 분에게… 예후가 좋지 않다는 소식과 집으로 내려오신다는 말씀에 그냥 눈물만 흘렀다. 남편도 큰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못하고 몰래 눈물을 닦고 있었다. 12월 13일에 대부님을 뵈러 레지오 단원들과 함께 대부님 댁으로 갔다. 복수가 차서 부풀어 오른 배, 통나무처럼 부은 다리, 온몸이 노란 물감으로 목욕한 듯 보였다. 건강하고 당당하게 계시던 모습은 어디 가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한 모습이었다. 견진성사를 받던 날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도 간데없고… 그 와중에도 얼굴엔 미소를 띠고 계셨다. 봉성체를 위해 신부님을 기다리신다고 했고 우리가 함께할 수 있었다. 마음을 놓으셨는지 봉성체를 하고 난 후 대부님은 더 편안해 보였지만 지켜보는 우리는 슬펐다. 남편은 그런 대부님을 더 애틋해 하였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매일매일 대부님을 뵈러 갔고 후회가 남지 않게 해드리라는 내 말에 남편은 고맙다고 했다. 좀 더 편하게 계실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해드리면서 정말 아들처럼 극진하게 모셨다. 성당 어르신들이 저런 대자 한 명 나오기 쉽지 않다고 칭찬해 주셨지만 위로가 되지 않았다. 상황은 점점 안 좋아졌고 12월 19일에 우리 부부 모두 야근을 하고 나와서 대부님 댁에 가려고 전화를 드리니 응급실에 계시다고 했다. 응급실로 곧장 달려갔고 이제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아니 어떻게 한 달 만에 이런 일이… 말문이 막히고 앞이 안 보였다. 남편이 속한 레지오 단원들도 급하게 응급실로 오셨다. 마지막 말씀을 남기시려고 대자 미카엘을 찾는다고 하셨고 남편은 그렇게 한참을 대부님과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나 미카엘라를 찾는다 하여 눈물을 꾹 참고 대부님 옆에 서니 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시더니 “이쁘다. 고맙다. 신앙생활 잘해라. 더 못 챙겨줘서 미안하다. 마음 아프지 말고 미카엘이랑 잘 살아라. 너무 잘하려 애쓰지 말고 천천히 가라.”고 하셨다.

2019년 12월 20일 오후 4시쯤, 64세로 아직 이른 연세의 대부님은 거짓말처럼 우리 곁을 떠나셨다. 아직 할 일이 많다면서도 홀연히 주님 곁으로 가셨다. 선산에 대부님을 혼자 두고 내려온 날 남편은 아버지를 잃었다고 슬퍼했다. 나는 대부님 장례를 치르면서 많은 경험을 했다. 연도, 장례미사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는데 이 또한 대부님이 주신 신앙생활의 마지막 선물이라 생각했다. 그 후 난 대부님이 가신 빈자리인 남편의 옆자리에 레지오 팀으로 들어갔다. 아직 정식 단원은 아니지만 감사하게 여긴다. 대부님이 가신 지 두 달 후, 2020년 2월에는 먼저 암 투병을 하시던 레지오 단장님이 주님 곁으로 가셨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또 두 달 후, 늘 우리 부부를 응원해주시며 환하게 웃는 얼굴이 아이처럼 순수하셨던, 우리에게 견진성사를 해주시고 대부님 장례미사까지 해주셨던 이수승(베드로) 본당 주임신부님께서 부활절에 거짓말처럼 갑자기 영면하셨다. 코로나19로 인해 신자 없는 장례미사를 봉헌하시고 홀로 쓸쓸히….

단 몇 달 만에 슬픈 일들이 겹쳐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던 때 남편은 복사단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신심을 더욱 굳히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성구인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

라.”(마태 14, 27) 이 말씀처럼 난 또다시 용기를 내어 해설에 도전했다. 지금은 야간 근무 시 평일 수요일 미사에 해설 봉사를 하고 있다. 모든 게 마음먹기 나름이고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를 내면 할 수 있음을 실감한다. 대부님을 만나면서 일어난 기적 같은 일들이 슬프지만 감사하다.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마음이 없어서 못 한다는 걸 알게 된 후, 천천히 가라는 말씀처럼 대부님이 계셨더라면 “미카엘, 미카엘라, 지금 잘하고 있어.” 라고 해주셨을 것이다. 요즘 수녀님은 우리 부부를 보고 늘 함께한다고 보기 좋다고 하신다. 복사, 해설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또한 아무나 못 하는 일… 앞으로 잘해 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 부부는 여전히 대부님을 그리워하고 있다.

남편이 닮고 싶다던 고(故) 임병식 그레고리오 대부님, 이제 편히 쉬세요. 주님 곁에서 우리를 지켜봐 주세요. 많이 감사드리고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보고 싶습니다. 이제 나의 소망이 있다면 언젠가는 성가대에 올라가서 그 누군가에게 내가 들었던 그 천상의 소리를 들려주고 싶다.

 

* 한국평협 주최 한국평협 가정선교체험 공모전에서 수상한 대구대교구 소속 신자분들의 수상작 연재는 이번호로 끝맺습니다. 애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