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신부님의 독서 일기
망가진 언어로 다시 이야기를 쌓아올렸습니다만


글 전형천 미카엘 신부 | 국내연학

 

‘그해 봄’을 보내고, 사소하고 시시한 날들이 하루씩 쌓여 계절이 바뀐 다음, 철 지난 문학지를 무심하게 뒤적거리다가 한 문장에 눈이 멈추었습니다. 김애란 작가의 고백이었습니다.

 

“이제는 말 몇 개가 아닌 문법 자체가 파괴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글을 지어 밥을 먹고 사는 사람이 말이 허물어지고 말의 법칙이 망가졌음을 체험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말과 글에 매료되어 말과 글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고 살아가다가 밥까지 먹고 살게 된 사람을 작가라고 한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말과 글이 가지는 무게가 남다를테지요. 조금 과장하면 그에게는 말과 글이 살아가는 터전이고 유일한 세계일텐데, 말과 글이 무너지는 것은 곧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도 같은 일은 아니었을까요.

 

‘그해 봄’을 겪은 사람들 가운데는 어떤 낱말에 따라와 드리워질 어둠에 시달릴 사람도 있겠지요. ‘바다’란 단어는 더 이상 바다만을 뜻하지 않을 것이며, ‘침몰’이나 ‘익사’라는 말들은 더 이상 은유나 상징으로 읽을 수도 쓸 수도 없을 것이고요. 어떤 단어를 읽을 때마다 불편함을 느낄 것이고, 무심코 써놓고도 애써 지워 시간이나 인생이란 단어로 다시 써야 하겠지요. 그렇게 익숙한 말조차 마음껏 사용할 수 없을 때마다 ‘그해 봄’ 본 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임을 생각하게 될까요. 아마도 김애란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겠지요.

 

부끄럽지만 김애란이 망가진 언어를 가지고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겨울 김애란은 단편 소설 “입동”을 내놓았습니다.

이 소설은 서울 변두리에 작은 아파트를 마련한 삼십대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집값의 절반을 대출을 끼고 겨우 마련한 작은 집이었지만 작은 행복을 하루하루 누리던 어느 날, 후진하는 어린이집 차에 치여 아이가 세상을 떠납니다. 작가는 그날 이후 이어지는 부부의 삶을 그러냅니다. 어린이집 원장은 운전사를 바꾸고 현장에 있던 보육교사를 해고시켰으며 보험을 통해 대가를 지불했으므로, 마무리된 일에 무엇을 더 바라냐는 듯 부부를 바라봅니다. 대출과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었던 부부는 보험회사로부터 건네받은 서류에 계좌번호를 쓰지만 계좌번호를 쓰는 순간 어린이집 원장을 용서한 것 같은 기분에 시달립니다. 아이 보험금 통장에 손댈 생각도 못하는 사이, 아이 아빠는 보험회사 직원이라는 이유로 동네 사람들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소문”을 옮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이 엄마는 “아이를 잃은 사람은 옷을 어떻게 입나, 자식 잃은 사람도 시식 코너에서 음식을 먹나” 사람들이 그렇게 지켜보는 것 같아 집밖으로 나가지도 못합니다.

이 막막한 소설은 늦은 밤 부부가 도배를 하는 장면으로 끝이 납니다. 늦은 밤 부부는 부엌을 도배하며 대화를 나눕니다. 보험금을 헐어 빚을 갚기로 합니다. 마지막 도배지를 붙이려 할 때 벽 아래에 아이가 자기 이름을 써놓은 것을 발견합니다. 부부는 아이를 떠올리며 울기 시작합니다. 작가는 아이 아빠의 입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탄식과 안타까움을 표한 이웃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기 시작했는지. 그들은 마치 거대한 불행에 감염되기라도 할 듯 우리를 피하고 수군거렸다. 그래서 흰 꽃이 무더기로 그려진 벽지 아래 쪼그려 앉은 아내를 보고 있자니, 아내가 동네 사람들로부터 ‘꽃매’를 맞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많은 이들이 ‘내가 이만큼 울어줬으니 너는 이제 그만 울라.’며 줄기 긴 꽃으로 아내를 채찍질 하는 것처럼 보였다.

- 다른 사람들은 몰라. 나는 멍하니 아내 말을 따라 했다.

- 다른 사람들은 몰라. 그러곤 내가 아내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

 

세 해가 지난 여름, 김애란은 “입동”과 다른 여섯 편의 단편을 묶어 소설집을 펴냅니다. 『바깥은 여름』입니다. 그러나 소설집 어디에도 “바깥은 여름”이라는 단편은 없습니다. 다만 “풍경의 쓸모”라는 단편에서 이런 문장이 있더군요.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그러니까 작가는 여름날의 스노우볼(유리구슬 안에 장식품을 넣고 액체를 채워 눈이 내리는 것처럼 꾸민 물건)을 통해 주인공의 마음을 그러내고 있는 셈입니다. 절기를 가리키는 말 “입동”은 ‘설 입’자를 쓰지만 김애란은 자신은 그것을 ‘들 입’ 자로 썼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겨울이라는 말도 단순히 계절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겠지요. 시간은 끊임없이 앞으로 뻗어 여름이 되었는데도 겨울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렇게 어느 한 순간에 붙들려 제자리에 멈추어 있는 사람들을 표현하고자 했을까요.

김애란이 『바깥은 여름』을 펴냈던 그 여름, 김영하 작가도 일곱 편의 단편을 묶어 소설집 『오직 두 사람』을 펴냈습니다. 그 가운데 “아이를 찾습니다”란 단편은 “입동”과 마주 놓고 읽으며 생각을 포개놓을 수 있겠더군요. 김영하도 김애란처럼 ‘그해 봄’을 보냈기 때문에 닮은 생각을 했던 걸까요. 아무튼 김영하는 단편집을 묶어내면서 작가란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잘 느끼는’ 사람이 아닐까 고백합니다. 어쩌면 사건보다 더한 비극은 사건 이후에 벌어진다는 것을 느꼈던 걸까요. 김영하는 이렇게 덧붙여 놓았습니다.

 

“이 소설(아이를 찾습니다)의 주인공은 아이를 잃어버림으로써 지옥에 살게 됩니다. 아이를 되찾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지옥은 그 아이를 되찾는 순간부터라는 것을 그는 깨닫게 됩니다. 이제 우리도 알게 되었습니다.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

 

다시 봄을 마주하며, 작가들이 망가진 언어로 쌓아올린 이야기들을 기웃거립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그해 봄’을 마주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겠지요. 그래도 김애란과 김영하와 같은 글쟁이들이 망가진 언어를 가지고서라도 이야기의 집을 다시 지어주기를 기다립니다. 힘싸움과 밥벌이가 그런 아픔을 외면하거나 이용하는 사이, 망가진 말과 글이 빚어낸 이야기는 슬픔을 방치하지 않겠지요. 적어도 그런 글을 읽는 것은 무척이나 힘이 들겠지만 그런 독서를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이야기가 비추는 슬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므로. 여지없이 ‘그해 봄’을 함께 견뎌내야 할 것이므로.

 

* 김애란,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계간 문학동네, 2014 여름호(통권 79호)

** 김애란, 『바깥은 여름』, 문학동네, 2017.

*** 김영하, 『오직 두 사람』, 문학동네,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