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우리 동네 골목신앙
엿, 그 사랑스러운 한마디!


글 이재근 레오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오래전 라디오에서 재미있는 사연을 들은 적이 있다. 어느가족이 함께 드라이브를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라디오에서 서양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들을 달콤한 이름으로 부른다며 ‘허니(꿀)’ ‘스위티(달콤한)’라는 단어를 소개하고 있었다. 즉 사랑하는 이들을 부를 때 이름 대신 “허니! 스위티!”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연 속 아버지가 함께 드라이브를 하고 있는 가족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나도 서양 사람들처럼 앞으로 너희 엄마를 부를 때 사랑을 가득 담아 달콤한 단어로 부르기로 했다. 앞으로 나는 너희 엄마를 ‘엿’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어릴 적 나에게 ‘엿’이란 하느님과 같은 존재였다. ‘엿’을 위해서라면 엿장수에게 무엇이든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의 분신과도 같았던 자전거를 ‘엿’과 바꾼 적도 있다.

자전거 타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친구들이 자전거 타는 모습을 항상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 당시에 우리집은 다른 집보다 좀 가난했기 때문에 부모님은 나에게 자전거를 사 주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 나의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많이 아프셨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생일에 부모님께서 자전거를 선물해주셨다. 우리집 형편에서는 큰 결심을 하신 것이다. 친구들 자전거보다 훨씬 멋지고, 새로 나온 튼튼한 자전거였다. 아무래도 내가 더 이상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놀기를 바라셨던 듯하다. 다치지 말라고 하시면서 무엇보다 “절대 잃어버리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부모님은 내 손에 자전거 키를 쥐어 주셨다. 너무나 행복했다.

다음날 바로 자전거 타는 법을 터득한 나는 친구들과 함께 열심히 타고 다녔다. 나의 분신과도 같았던 자전거에 이름도 지어주었다. 하얀색이라서 ‘백설이’라고 지었다. 이처럼 나의 분신과도 같았던 ‘백설이’인데 어느 날 하얀색 ‘엿’과 맞바꾸어 버렸다. 그날따라 ‘엿’이 너무 먹고 싶었고, 그 달콤함은 나의 분신인 ‘백설이’ 마저 망설임 없이 엿장수에게 바치도록 만들었다.

 

그날 저녁, 태어나서 가장 많이 맞았다. 이렇게 맞다가 죽겠구나 싶을 정도로 맞았다. 그러나 내 몸은 생각보다 건강했고 생각보다 잘 버텼다. 그래서 더 오랫동안 맞았다. 다음날 부모님께서 자전거를 다시 찾아오셨다.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가서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똑같이 ‘백설이’와 ‘엿’을 바꿀 것 같다. 왜냐하면 그만큼 ‘엿’이 달콤하고 맛있었기 때문이다. 그 달콤함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내 분신인 ‘백설이’를 다시 바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날 사람들은 ‘엿’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사용한다. 심지어 나 역시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어렸을 적 내 모든 걸 바쳐서라도 맛보고 싶었던 그 달콤한 단어가 이제는 아무 감흥도

없는 단어가 되어 버린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그에 맞게 변해야 할 것이 있는 반면 지켜야 할 것도 있다고 생각한다. 올해 마흔세 살인 나는 더 이상 여덟 살 때처럼 ‘엿’과 ‘자전거’를 바꾸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덟 살 때 내가 먹었던 ‘엿’처럼 내 모든 것과 바꾸고 싶을 만큼 간절하게 지키고 싶은 것 또한 사라져버렸다. 지켰어야 할 무언가를 지키지 못한 기분이다.

 

사순 시기는 우리에게 삶을 돌아보도록 초대한다. 그리고 우리는 삶을 돌아볼 때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주위 사람들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를 주로 생각한다. 이번에는 다른 기준을 제안하고 싶다.

 

세월이 지나도 지키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