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프랑스에서 온 편지
선교, 과연 권할만 한가?


글 심탁 클레멘스 신부|프랑스 스트라스부르교구 선교사목

 

‘때로 겪는 서럽고 자존심 상하는 이런 불편함들이 나의 이 선교 활동을 멈추게 할 수 있는가? 예상치 못한 어려움들이 잠재되어 있고, 분명히 고향에서 보다 더 고생스러운 해외 선교활동을 후배들에게 권고할 수 있는가?

 

저는 간헐적이긴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어떤 사건들이 발생할 때마다 신학적?도덕적 굴레를 씌우지 않고 이런 질문들을 되새김질하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혹시라도 선교 동기가 너무 인간적이고 낭만적인 이상이거나 현실 도피적인 것이라면, 아마도 선교사의 내적 어려움이 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더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선교지에서 더 많은 상처를 스스로 입고, 신자들과 주고 받을 수도 있겠다는 염려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또한 선교지마다 외국 선교사에게 거는 역할과 기대가 다를 수도 있어서 순수한 동기 및 좋은 지향과 다른 결과가 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위로부터 오는 주님의 은총을 원천으로 하며 저는 개인적 동기로서 ‘예수님의 광야에서처럼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님을 만나러 광야로 떠나자! 거기서 주님과 함께 당신이 원하시는 사명을 목숨으로 사수하자.’는 지향을 갖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이 마지막 시간을 주님이 가장 중하게 여기시는 일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몇 년간의 경험상, 선교는 처음부터 성령의 이끄심에 의지하는 것이어야 하며, 사탄과 대적하는 영적 전쟁터에 주님의 군인으로서 최대한 완전 무장을 하고 나서는 것이어야 한다고 더욱 확실히 느낍니다. 항상 하느님의 나라와 그 군대인 교회의 경계 태세를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 주님께 의지하며 깨어 있어야 하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기 위해 기도에 매진해야 함을 비로소 몸으로 배웁니다. 영적 광야에 나선 선교사에게는 자발적 고독이야말로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섬기며 대면하고, 도움을 청하며 위선을 떨지 않고 정직하고 절실하게 기도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순간입니다. 또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영적 소통이 가능한 선교사 혹은 사제 동료의 소중함도 더 크게 깨닫습니다. 고향에 있을 때보다 친한 동기들과 쉽게 만날 수 없는 점도 선교지에서의 시간과 에너지를 더 잘 관리하게 하는 장점이 됩니다. 더 많은 개별접촉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현지에서 만나는 영적으로 목마르고 배고픈 사람들과 나누고 증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국 고향에도 그런 원초적 의미의 선교 활동이 절실히 필요한 줄 잘 압니다. 문제는 저 자신입니다. 개인적으로 진정 복음적 이유로 저의 성소를 온전히 살기 위해 모든 과거로부터 저를 완전히 잘라내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떠나야 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보편 교회 차원에서 더 유익할 수 있습니다. 저의 에너지를 전부 바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의 여러 가지 한계와 선교 현장의 갖가지 사건들과 문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내적으로 최대한 기도와 사목에 매달려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을 기쁘게 증거하려면 저 자신이 주님의 은혜에 힘입어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고, 저 자신이 갖가지 약점들을 신앙으로 극복하면서 말씀의 위로와 기쁨을 스스로 증거하며 선포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고향 친구들과의 우정에서 얻는 위로보다 선교지에서 고생하면서 얻는 신앙의 위로가 훨씬 더 큽니다. 역으로 그 덕분에 친구들과의 우정도 더 깊어지고 커집니다. 벗들과 기도 안에서 서로 지지하고 지원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선교사는 선교지에서는 새로운 신앙의 친구들을 만나고 새로운 신앙의 가족들을 만들어 나갑니다. 유교식으로는 부모에게 불효를 저지르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으로는 주님께 효도합니다. 선교사는 사심없이 자유롭게 그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 하루하루 일상의 기도와 미사 안에서, 특히 매일의 말씀 안에서 위로와 힘, 용기와 기쁨을 찾고 얻으며 살아갑니다. 매일매일이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복은 있으나 일상의 기도 생활이 없다면, 선교사는 살 힘을 완전히 잃고 만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누가 강조하지 않아도 기도의 소중함을 절절히 느낍니다.

지난 호에 이어

저는 그간 오베르네 본당의 소란을 조사하고 대주교님께 보고 준비를 하시던 주교 대리 신부께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왜냐하면 참사회 전, 전화로 인사이동의 이유를 요약하시는 그분의 말씀 마지막 두 문장 때문이었습니다. 첫째, 본당 내 끌레망의 지지 세력도 있지만 반대자들도 있다. 둘째, 콜마르에서도 지역장과의 문제가 있었다. 즉 ‘제가 문제의 원인’이며 ‘이동의 원인’이라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저는 무조건 순명을 선언한 입장이지만 사건 분석과 결론에는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두 건 모두 저에 대한 비판이나 고발에 대한 저의 해명을 대부분 들으셨고, 대질 상황에서 상대방들의 주장이 대부분 오해나 허위임을 직접 보고 들으신 분의 결론으로서는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밤새 뒤척였습니다. 마귀가 바벨탑 사건 때처럼 인간들의 언어와 소통에 혼란을 주어 이런 파괴적 상황이 벌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교회의 책임 있는 분이 신부들과 신자들이 함께 연관된 사건을 대하면서 일방적이고 편향적으로 사건정리를 하시면, 장차 다른 일로 교회를 더 큰 위험에 처하게 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까지 들었습니다. 교회 내의 어떤 스캔들을 객관적 진단과 공정한 처리를 하지 않음으로 해서, 교회 전체가 위기에 처하는 상황들을 떠올렸습니다. 저 자신만을 변론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 교회를 지킨다는 내적 명분으로 다음 날 늦은 오전에 장문의 문자를 보냈습니다.

‘대주교님의 어떤 결정에도 무조건 행동으로 순종하겠습니다. 단, 저의 이성과 양심은 주교 대리 신부님의 논리에 승복하지 못 합니다.’ 그러자 오후 요양병원 미사 중, 주교 대리 신부님의 전화와 메시지 녹음, 문자가 연이어 도착했고 '만나서 이야기 하자.’고 하시어 우리는 약속을 잡았습니다. 다음 날, 그리고 그 며칠 후에도 직접 찾아 오셔서 세 번을 더 만났습니다. 결국 서로의 이해와 대화의 한계, 특히 문화 충격(한국 문화와 알자스 문화, 서로 간의 개인차)을 인정하였습니다. 저는 불만 사항을 분명히 밝혔고, 동시에 대주교님의 결정에 무조건 순명하겠다는 뜻을 전하였습니다. 이 내용을 수첩에 적으시며, 주교 대리 신부는 인사회의 때 그대로 낭독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화창하다가도 갑자기 바람이 불고 추운 봄날, 구속주회 선교사들의 공동체가 있는 비쉔베르(Bischenberg) 십자가의 길 언덕을 거닐었습니다. 우리는 성모찬송가를 마침기도로 바쳤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

인사이동

스트라스부르 서쪽, 현재의 오베르네에서 북쪽으로 30분 거리 베스토호픈(Westhoffen) 공동체(5개 본당)의 협력 사제로 6월 중에 교구 공문에 발령이 날 예정입니다. 주임 신부는 아프리카 신부로서 저와 동시에 부임하는 동갑내기. 그는 마를랜하임(Marlenheim) 공동체(4개 본당)를 맡습니다. 저의 실제 이사는 가을 신학기 개학 후 10월 경에 가능할 것입니다. 그동안 사제관 준비 공사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 정정합니다 : 지난 2월호 33쪽 위에서 첫 번째 줄 “콜마르 지역장(50세, 서품 10년차…)” 신부님은 서품 10년차가 아니라, 서품 20년차라고 전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