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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의 독서일기
‘읽기’라는 사건, 읽는행위의 거룩함’


글 전형천 미카엘신부|국내연학

 

1. 지난 학기 선생님 한 분을 모시고, 세 분의 부제님과 한 분의 학사님과 함께 복음을 읽었습니다. 정말로 읽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것들이 많았습니다. 읽기도 전에 알고 있다고 여겼던 착각, 누군가 뒤집어씌운 선입견들을 버렸습니다. 그제야 복음이 건네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리더군요. 그렇게 표현과 표현이 만나 이룬 문장을 더듬으며, 문장과 문장 사이의 오솔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뒤돌아보면 어느새 표현과 문장은 이야기의 숲을 이루고 있었고, 이야기는 읽는 사람에게서 의미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가졌던 것을 다 버렸기 때문에 가난한 마음으로 함께 걸었던 우리는, 서로의 손에 들려있는 의미의 열매를 구경하며 조금씩 맛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읽었지만 다른 의미를 가지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다시 창가로 돌아와 한 줄기 햇살을 책장 위에다 넓게 펴고 홀로 읽기 시작합니다.

 

2. 무엇이든 함께 읽고 돌아오는 날이면 ‘읽기’, 읽는 행위 그 자체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얻어 읽었던 글귀를 소리 내 읽으며 손가락으로 허공에 새겨보곤 했습니다.

 

“책은 반드시 세 번 읽어야 합니다.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으로 그 필자를 읽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것을 읽고 있는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합니다. // 모든 필자는 당대의 사회 역사적 토대에 발딛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를 읽어야 합니다.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하는 까닭도 마찬가지입니다.” - 신영복, 서삼독書三讀, 『처음처럼』, 266-267

 

‘읽기’라는 사건에는 언제나 세 주인공이 함께합니다. 읽는 사람(독자)과 쓰는 사람(필자), 그리고 이 두 사람을 이어주는 ‘텍스트(쓰여진 이야기)’입니다. 읽는 사람은 이야기를 가운데 두고 쓴 사람을 만납니다. 읽는 사람은, 이야기 없이 쓴 사람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읽는 사람은 무엇보다 이야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제대로 읽기 위하여 이야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읽는 사람이 이야기를 충실히 읽었다고 해서 쓴 사람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읽는 사람은 쓴 사람을 읽은 것이 아니고, 쓴 사람이 써놓은 것만을 읽습니다. 이야기는 쓴 사람이 쓴 것이지, 쓴 사람이 아닙니다. 읽는 사람에게 쓴 사람은 닿을 수 없는 저 건너편에 있습니다. 읽는 사람과 쓴 사람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절대적 거리’가 있습니다. 다만 읽는 사람은 쓴 사람의 이야기를 더듬어가며 쓴 사람을 ‘상상’하고, ‘재구성’할 수 있을 뿐입니다. 반대로 쓴 사람도 읽는 사람을 모두 알 수 없습니다. 쓰는 사람은 그 이야기를 읽어주기를 바라는 어떤 사람을 떠올리며 쓰겠지만, 그 이야기는 전혀 다른 사람이 읽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쓰는 사람은 읽는 사람이 어떻게 이야기를 읽을지 바랄 수 있을 뿐 그 결과를 통제할 수도 없고 알 수 없습니다.

읽는 사람은 쓴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이야기는 쓴 사람과 읽는 사람에게서 다르게 읽힙니다. 그래서 읽기는 실패합니다. 읽기는 언제나 오독(誤讀)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읽는 사람에게서 다르게 읽히기 때문에 더욱 풍성해집니다. 그래서 읽기는 쓰기처럼 창조적입니다. 이야기를 읽기 전의 나와 이야기를 읽은 이후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결국 읽는 일은 읽는 사람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읽기는 이야기를 읽은 이후의 나를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독서는 새로운 탄생입니다. 필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탈주脫走입니다.” - 서삼독書三讀, 『처음처럼』, 266-267

 

글귀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이제 저는 이 문장을 읽습니다. 이 문장을 쓴 사람을 생각합니다. 그는 평생을 읽고 썼습니다. 도리없이 읽고 쓰며 한 생을 살아냈습니다. 그의 읽기와 저의 읽기는 같을 수 없겠지만 저의 읽기도 언제나 새로운 탄생을 꿈꿉니다.

3. 읽고 쓰며 한 생을 살아낸 또 다른 사람을 생각합니다. 그는 일본 빈민가에서 태어났습니다. 해방 이후 귀국했지만 한국전쟁으로 가족들과 헤어졌습니다. 이리저리 떠돌면서 여러 일을 했지만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고, 폐병을 얻은 뒤에야 마을로 돌아왔지만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온몸이 망가져 버려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갈 데가 없어지자 마을교회에 딸려있는 토담집에 얹혀 살면서 종지기로 일했습니다. 콩팥과 방광을 떼어내고 소변주머니를 달고 다니면서도 한 번도 종치는 것을 소홀히 한 적이 없었습니다. 진실된 마음이 아니면 통하지 않는다고 한겨울에도 장갑을 끼지않고 종을 울렸습니다. 여름이면 개구리가 드나들고, 겨울이면 생쥐가 품속으로 파고드는 곳에서 살면서 되는대로 읽었습니다. 자주 교회에 앉아 성경을 읽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유언장에다가 자신이 평생을 마주했던 정서를 이렇게 표현해두었습니다. “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쓰기 시작합니다. 후일 그가 고백하기를 “뭐 하나 가진 것 없는 자신이 이 생애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자취는 글 밖에 없다.” 했었지요. 그리고 동화 한편을 써냅니다. 그리고 이 동화는 제1회 아동문학상을 수상합니다. 바로 『강아지똥』입니다. 모두가 더러워하는 개똥이었기 때문에 괄시받고 비웃음을 사며 ‘나같이 더러운 똥이 세상에 왜 있는가?’ 질문하던 강아지똥은 민들레싹을 만나 스스로 거름이 되어주면서 자신도 세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확인하며 기뻐한다는 이야기지요. 그는 후일 동화를 책으로 출판하면서 이렇게 적어 두었습니다.

 

“거지가 글을 썼습니다. 전쟁마당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얻어먹기란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어찌나 배고프고 목말라 지쳐버린 끝에 참다못해 터뜨린 울음소리가 글이 되었으니 글다운 글이 못 됩니다.” - 권정생, “작가의 말”, 『강아지똥』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의 글쓰기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권정생 선생은 20여 년을 안동 조탑리 일직교회 문간방에 머물며 읽으며 썼습니다. 동네 청년들이 교회 뒤쪽 빌뱅이 언덕 앞에 5평의 흙집을 지어준 뒤에는 그곳으로 자리를 옮겨 생을 다할 때까지 원고지 위에 한자 한자 꾹꾹 눌러쓰며 이야기를 지었습니다. 그 이야기들이 100여 편에 달합니다.

 

4. 선생의 글을 읽으며 선생의 읽기를 생각합니다. 선생은 언제나 당신이 읽어온 것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썼습니다.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는 마을교회 종지기였던 자신을 모티브로 삼은 이야기입니다. 『몽실언니』는 당신이 겪은 전쟁과 현대사의 질곡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선생은 자연에서 벌어지는 일을 읽으며 배웠습니다. 선생의 유작인 『엄마 까투리』와 같은 작품들은 선생이 어디에서 배웠는지 짐작케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와 같이, 그리스도 신앙인으로 성경을 읽으면서 묵상한 내용을 가지고 쓴 작품도 여럿 있습니다. 그렇게 선생께서는 어디서나 읽으며 늘 배우셨습니다. 선생께서는 어느 주일학교 아이가 쓴 작문 한 구절에서도 배우셨습니다.

 

“나는 지난번, 주일날인데도 보리 이삭을 주우러 갔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이 벌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는 아파 누워계시고, 엄마는 오늘도 남의 일을 갔습니다. 나는 보리 이삭을 주워 와서 아버지께 죽을 끓여드렸습니다.” - “순정이, 영아와 깨끼산 앵두꽃과”(1982년), 『빌뱅이 언덕』, 281

 

선생께서는 연작 수필로 교회의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시기도 하셨지요. 소신껏 높이신 목소리 가운데, 당신의 시선이 어디에 머물러 있었는지 또 신앙인으로서 어떤 성찰을 해오셨는지 드러납니다. 당신이 보고 읽으며 배운 것들을 함께 나누고 싶으셨을까요.

 

“김목사님, 목사님은 목사 되기 위해 목사님이 되신 건 아니겠지요. 그러니 목사님은 진정한 목사님이 되십시오. 신학교 나와서 안수받았다고 진짜 목사가 된 건 아닐 것입니다. … 목사님은 과연 이웃 사랑, 하느님 사랑을 어떤 것으로 알고 계십니까? 하느님을 시멘트 건물 속에 가두어 놓고 한 주일에 한 시간씩 면회 가는 것이 하느님 사랑입니까? … 당신의 어린양들에게는 해방을 주고 불의를 도모하는 권세자들을 향해 외치십시오. 그래서 고통을 느끼십시오. 성공하는 목사가 아닌, 외치다가 죽는 실패하는 목사가 되십시오. … 거룩한 성전에서 값싼 눈물로 조용히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현장으로 나가서 온 영혼과 몸을 내던지는 것입니다.” - “김목사님께”(1981년), 『빌뱅이 언덕』, 287-288

 

“김목사님, … (예수가) 함께한 민족의 수난사를 구약성서로 공부했고, 종교가 인간 위에 군림했을 때 하느님도 한갓 우상으로 전락했음을 아프도록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는 율법의 종이던 인간을 율법의 주인으로 선포했고, 하느님을 인간을 섬기는 원래의 모습대로 보여준 것입니다. … 예수는 지금 굶주리는 곳에 함께 살고, 지금 우는 곳에 함께 울고, 지금 욕 먹고 비난받고 내쫓기고 포박당하는 곳에서, 억울하게 매 맞고 고문당하는 곳에서, 불의로 인해 신음하고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현장에서 생생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 ” - “다시 김목사님께 1”(1982년), 『빌뱅이 언덕』, 303-304

 

“김목사님, 지금 이 땅에선 먹고살기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고통스레 살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성서의 아름다운 구절구절이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얼마만큼의 위로와 힘이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 “다시 김목사님께 2”(1986년), 『빌뱅이 언덕』, 310

 

선생께서는 언제나 함께 읽으셨습니다. 비나리의 정호경 신부, 농민으로서 생각하고 글을 쓰셨던 전우익 선생, 우리말 운동을 하시면서 아동문학을 작업하신 이오덕 선생과 같이 자신의 자리에서 정직하게 질문하며 진솔하게 답하신 분들과 함께 말과 생각을 나누셨습니다. 선생께서는 유언도, 함께 읽으며 말과 생각을 나누던 이들에게 남기셨습니다.

 

“정호경 신부님, 마지막 글입니다. 제가 숨이 지거든 각각 적어 놓은 대로 부탁드립니다. // 지금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 뭉툭한 송곳으로 찌르는 고통이 계속 되었습니다. 1초도 참기 힘들어 끝이 났으면 싶은데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됩니다. 모두한테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 하느님께 기도해주세요. 제발 이 세상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게 해 달라고요.”(2007.3.30. 오후 6시 10분) - 권정생•이오덕,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371

 

얼마 뒤 선생은 떠났고, 사람들은 선생의 바람대로 그의 몸을 태워 빌뱅이 언덕에 뿌렸습니다. 선생의 유산은 아이들을 위해 쓰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장례에 몰려온 사람들을 보고 그가 이렇게 유명한 사람인지 알았다고 합니다. 평생을 읽고 쓰며 사람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권정생 선생은, 이제 자신이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사람들에게 읽히며 기억되고 있습니다. 읽던 사람 권정생은, 이제 이야기로 읽히고 있습니다. 권정생을 읽는 많은 사람들은 그를 ‘성자’라고 하기도 하고, ‘하느님을 닮은 사람’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권정생을 거룩한 사람이라 기억하는 것은 그의 이야기 때문이겠지요. 권정생을 거룩하게 만든 것은 결국 그 읽기, 좋은 친구들과의 함께 읽기는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그의 이름 정생(正生) 마저도 새로운 의미로 읽히지 않겠습니까.

 

5. 저는 읽는 사람입니다. 읽는 것이 일입니다. 부끄럽지만 사제직무를 다하기 위해 미약하나마 읽으려 안간힘을 씁니다. 사제는 말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듣고 읽는 사람임을 자주 생각합니다. 성경을 읽습니다.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읽습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그 시도는 자주 실패하지만 그 실패마저도 하나의 사건으로 읽고 다시 배웁니다. 제대로 읽고 들어야만 제대로 쓰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배웁니다. 사제의 말과 글은 일방적인 선포가 아니라 말씀과 현장의 만남이어야 한다는 것을 자주 생각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요한 1, 14)는 말씀을 새기고 또 새깁니다.

읽기의 거룩함을 생각합니다. 성경이 거룩한 이유는 성경에 새겨진 하느님의 말씀과 신앙인의 체험이 거룩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그 성경도 누군가 읽어야만 의미를 가집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신앙인의 읽기 때문은 아닌가요. 그래서 읽기야말로 읽는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신앙의 전통은 그런 읽기가 거룩하기 때문에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라고 불러왔을까요. 그런 읽기를 통해 복음의 가르침은 읽는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부활한다고 믿습니다. 그런 읽기는 거룩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렇게 읽을 수 있다면 성경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에서도 배울 수 있겠지요. 그런 읽기를 하는 사람이라면 신문을 읽으면서도, 영화를 보면서도, 이웃들을 만나면서도 배워나가겠지요. 그러고 보면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읽으시는 분 같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은전을 잃은 주부나 양을 잃어버린 목자처럼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가지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 알려주셨더랬습니다.

 

오늘도 저는 읽습니다. 제대로 읽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과 함께 읽으면서도, 언제까지나 함께 읽고 싶습니다. 언젠가는 여러분과도 함께 읽고 싶습니다.

 

권정생, 『강아지똥』, 길벗어린이, 2014.

권정생, 『빌뱅이 언덕』, 창비, 2012.

권정생•이오덕,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양철북,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