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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수기
상실감 성찰기


글 이해정 루시아|매천성당

 

남편의 건강검진 결과에 붉게 그어진 항목을 보고 떨리는 마음으로 병원을 찾았을 때 췌장암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게 되었고 바로 수술을 하게 되었다. 수술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아주 다행이라는 희망적인 의사의 말을 듣고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막상 수술이 시작되고부터 기다리는 그 시간은 너무나 큰 고통이었다. 손에 쥔 묵주에 온 힘을 싣고 한 알씩 돌리며 간절히 기도를 하였다. 무사히 수술이 잘 되도록 떨리는 몸과 마음으로 애타게 빌고 또 빌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때 즈음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다.

며칠이 지나고 조금씩 회복이 되어 수술은 잘 되었다는 의사 선생님의 자신감 있는 격려를 받으며 퇴원을 했다. 암전문 요양원을 추천했으나 남편은 솔담(팔공산 자락의 집)에서 지내고 싶어 했다. 소나무 사이로 아침이 밝아올 때면 주방에서 나의 손길은 바쁘게 움직이고, 조금 떨어진 거실에서는 남편이 창밖을 보며 열심히 맨손 체조를 하고 있다. 퇴직 후 팔공산 자락에 자그마한 집을 짓고 텃밭에서 시간을 보내며 즐거워 했던 이곳에서 요양을 해야 함을 힘들게 받아들이고 서로가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었다.

남편은 퇴원 후 한동안 걷는 것도 힘이 들어 마당에도 못 나가더니 차츰 회복이 되어 집밖까지 산책도 하였다. 나는 수북이 쌓여 있는 암에 관한 책에서 본 내용들을 토대로 건강 밥상을 준비하느라 분주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며 이 터널의 끝에서 같이 웃을 날을 고대하며 여름을 보냈다. 가을이 되니 조금씩 안정이 되어 곱게 물든 단풍도 함께 즐기고 전원생활에도 많이 적응이 되었다. 첫눈이 내리는 그날에는 그 어느 때보다 들떠 사진과 동영상을 찍으며 즐거워 하였다. 포근한 거실에서 남편과 나란히 눈덮인 산과 들을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감사의 기도를 드렸던가? 자연의 섭리에 따라 느긋함과 겸손을 배우며 지금의 순간들을 소중히 간직하리라는 다짐으로 새해를 맞이하였다.

 

자연의 오묘한 변화를 즐기며 작은 들꽃 하나에도 기쁨을 누리고 매일의 기도로 하느님께 간절히 매달리며 평화로이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여름의 끝자락에서 남편에게 이상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장염인 줄 알고 병원을 찾았다가 암이 전이되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믿기지 않아 서울의 한 병원으로 가서 다시 진료를 받았는데 앞으로 길어야 4개월 생존이라는 답변에 우리 가족 모두는 충격을 받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남편은 초연한 모습으로 “인연으로 맺어진 우리가 때가 되면 당연히 이별이 있고 연결고리가 끊어짐으로 또 다른 인연이 만들어진다.”며 “원래 우리 인간은 실체가 없으니 사라짐도 당연하다.”면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였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통곡도 할 수 없었다. 나 자신의 무능함을 질책하다가 마음을 가다듬고 수소문 끝에 한가닥 희망을 안고 대전의 한방병원을 찾게 되었다. 한방병원을 찾아가서 치료를 하였지만 병세는 날로 악화되었다. 하루라도 더 자연 속에 지내고 싶어하는 남편 뜻에 따라 솔담에서 서로의 아픔을 숨기며 최대한 자연스러운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어김없이 마지막을 알리는 증세가 시작되면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계속되는 구토와 수척해지는 남편을 보면서도 ‘이별’이란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고 ‘기적’이라는 말에 더 무게를 두면서 하느님께 매달렸다.

 

입원 후 일주일쯤 되었을 때 남편은 잠에서 깨어나 “아버지를 만나려면 냉담을 풀어야 한다.”는 말을 해서 많이 놀랐다. 세례를 받고부터 16년 동안 계속 냉담 중이었기 때문이다. 급하게 신부님께 청해서 고해성사, 병자성사를 보았고, 남편은 “주님을 알고 가게 되어서 감사하다.”고 말하며 우리에게도 “매사에 감사하라.”고 했다. 냉담을 오래해서 성당에 대해서 거의 모르는 상태였는데 갑자기 주님을 찾고 은총에 대해 이야기하며 나에게도 “성당 활동을 못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순간 ‘주님의 기적이 이렇게 안셀모에게 이루어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알고 있던 모든 기도를 바치게 되었다. 그리고 남편에게 “당신은 안셀모로 다시 태어났으니까 우리는 미사 중에 만나면 된다.”고 했더니 남편도 “그래, 그러자.”면서 편한 모습으로 쳐다보았다.

 

물조차 삼키지 못하고 앙상하게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남편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하며 애태웠던 시간들을 내려놓고 선종기도로 영원한 이별을 준비하게 되었다. 잠시도 곁을 못 떠나게 하면서 ‘당신을 만나서 행복했고 먼저 가서 미안하다.’는 내용의 마지막 글과 함께 나에게는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었다. 편안히 눈을 감는 남편의 마지막 얼굴을 어루만지며 사랑의 말과 눈물의 부르짖음으로 하느님께 고이 보내야만 했다. 그리움을 아픈 추억으로 아름답게 간직하며 오늘도 나의 발걸음은 부지런히 성당을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