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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의 현장에서
저는 디스크 자키(DJ) 신부입니다


글 허진혁 바오로 신부 | 사회복지법인 대구가톨릭사회복지회 차장

 

“허진혁 신부 (면)휴양, (임)대구가톨릭치매센타 원목”

볼리비아 해외선교를 마치고 귀국한 뒤, 잠시 몸을 추스르다가 거의 8년 만에 받은 첫 교구사제 인사 발령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아, 이제 나는 사회복지 일을 정식으로 시작하는구나.’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아직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없었고, 기관에 정식 발령을 받은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저에게 ‘사회복지’는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새로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신학생 시절의 봉사활동부터 시작해서 보좌 신부로서 첫 본당에서의 경험, 심지어 볼리비아 해외 선교사 시절에도 끊임없이 사회복지와 관련된 일을 접해왔기 때문입니다.

 

인사발령 소식을 접하고 두 번째로 든 생각은 ‘여기서(구 대구치매센타, 현 대구가톨릭요양원) 과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였습니다. 기억을 되짚어 보니 신학생 시절, 이곳에서 주일학교 학생들과 함께 성탄 행사를 한 기억이 났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제가 한 것이라고는 학생들을 인솔해서 한두 시간 동안 그저 준비한 공연을 보여드리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앞으로 그곳에서 살게 될 제 모습이 머릿속으로 잘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막막함이 느껴졌고, 약간의 불안감마저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내가 뭔가 할 일이 있겠지.’ ‘막막했던 외국에서도 내가 할 일이 있었는데, 고국에서 뭔들 못하리.’라고 생각하며, 일단 가서 부딪쳐보기로 했습니다.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시작한 원목 신부 생활이었습니다. 다들 왜 이렇게 격하게 환영을 해주시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대구가톨릭요양원 역사상 전담 원목 신부는 제가 처음이었습니다. 물론 그전에도 원목 신부가 몇 명 있었지만 모두들 이웃 병원(성요셉 요양병원) 원목과 겸임하는 직책이었지 이곳만 전담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소위 ‘우리 원목 신부님’은 처음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원장이시던 정석수(유스티노) 신부님 이하 전 직원들, 그리고 어르신들까지 모두로부터 넘치게 사랑받는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심지어 어르신들은 말 그대로 제가 그냥 ‘눈앞에 지나가기만 해도’ 좋아해 주셨으니까요. ‘거기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했던 시간이 참으로 무색해지던 순간이었습니다. 같은 밥을 먹으며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어르신들에게는 충분해 보일 정도였습니다. 어르신들 보시기에 저는 손자뻘 되는 나이고, 저에게 어르신들도 할아버지 할머니뻘이었으니, ‘앞으로 슈퍼(super) 대가족이라고 생각하며 살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저는 스무 살이 될 때까지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지내는 것이 크게 낯설지도 않았고요.

 

그렇게만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발령 받은 지 겨우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무렵,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한국, 특히 당시 대구와 경북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급속도로 유행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당시 기억을 떠올려보면, 특히 대구·경북권 요양원의 분위기는 정말로 끔찍했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팬데믹이니 코호트 격리니… 난생 처음 들어보는 단어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 나왔고, 신천지 신자 검증(?) 논란과 지역 차별 분위기, 요양원 기피 현상 등 단순히 분위기뿐만 아니라 매일같이 일일동선 보고서를 기록해서 관할 관청에 제출해야 했고, 대중교통 이용 자제, 사우나 및 대형마트 출입 역시 제한되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부적인 어려움도 만만찮았습니다. 사회복지 시설은 외부의 원조와 봉사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 시설인데 그 모든 외부적인 지원이 거의 끊기다시피 했기 때문에(전국 공통 현상) 많은 것들을 자체적으로 해나가야 했습니다. 지금은 너무나도 익숙해져있는 마스크 착용도 당시로서는 정말 곤욕스런 일이었습니다. 집 밖에 나서는 순간부터 집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심지어 어떤 요양보호사님의 경우에는 가족에게서 전염될 것을 우려해서 집에서조차 마스크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어르신들의 경우에는 외출과 가족들의 면회가 차단되면서 우울감을 호소하시는 분들이 점점 더 늘어만 갔습니다.

상황이 생각보다 더 악화되어가고 길어지면서 서로 간에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피로도는 극심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제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했습니다.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시설 안에서조차 대면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제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몇 가지 프로젝트를 계획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프로젝트라고 할 만큼의 거창한 일은 아니었지만 원목 신부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해보자는 마음이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원내 방송이었습니다. 직원과 어르신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좀 녹이고 보듬어 드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매일매일 다른 장르의 음악을 선곡해서 한 시간 가량 틀어드렸습니다. 삭막하고 긴장감이 가득하던 원내에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니 분위기가 조금씩 누그러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주위에서 요양원 DJ라고 추켜 세워주시니 저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아예 진짜 DJ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점심시간 음악과는 별도로 금요일 퇴근 10분 전에 퇴근 방송을 시작한 것입니다. 비록 10분의 방송이었지만 반응은 나름 뜨거웠습니다. 오프닝 음악을 시작으로 일주일을 마무리하는 5분짜리 멘트와 미리 선정한 노래 한 곡을 틀어드리는 형식으로 진행했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첫 방송에서 했던 멘트를 소개해드리는 것으로 저의 첫 이야기를 마무리할까합니다.

 

[첫 방송 오프닝 멘트] 사랑하는 센터 가족 여러분, 원목 신부 허진혁 바오로입니다. 여러분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새로운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이름하여 “불타는 금요일, 퇴근 방송” 저는 이 코너의 새로운 DJ입니다. 차가운 봄비와 함께 오늘도 저물어 갑니다. 길게 이어지는 코로나19 사태로 이번 한 주간도 모두들 고생 많으셨죠? 말 못할 어려움과 스트레스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 참 아름답습니다. 지금 여러분과 함께 듣고 싶은 노래가 있습니다. 1961년에 나온 영어 팝송이라 먼저 가사를 번역해서 들려 드리겠습니다.

 

‘밤이 찾아오고 땅이 어두워지고 달만이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일한 빛이 될 때에도 나는 무서워하지 않을 거에요. 당신이 내 곁에 있어준다면요. 내 곁에 있어 주세요. 그대여, 그대여, 내 곁에 있어 주세요. 우리가 바라보는 하늘이 두 쪽 나거나 산이 바다 속으로 허물어져도 난 울지 않을 거에요. 당신이 내 곁에 있어준다면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을 거에요. 내 곁에 있어 주세요. 그대여 그대여, 내 곁에 있어주세요. Stand by me.’

 

[엔딩 멘트] 요즘처럼 이 노래 제목이 마음 속에 와 닿는 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옆에 있는 분들에게 환하게 웃는 얼굴로 노래처럼 한마디씩 건네면 어떨까요? “Stand by me” 저도 언제나 여러분들 곁에 있겠습니다. 편안한 주말 보내시고 월요일에 웃는 얼굴로 다시 뵙겠습니다.

 

* 이번 호부터 허진혁 신부님의사회복지의 현장에서가 새로 연재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