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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칼럼
화양연화(花樣年華)


글 허윤정 엘리사벳 | 통합의료진흥원 전인병원 가정의학과 전문의

 

예전 요양병원 근무시절, 어릴 적에 본 만화 영화 ‘호호아줌마’를 꼭 닮은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치아가 하나도 없는 통통하고 동그란 얼굴의 호호 할머니는 누구에게나 높임말을 쓰시며 요양보호사들을 힘들게 하지도 않는, 소위 예쁜 치매 환자라 직원들이 모두 좋아했습니다. 하루는 회진을 갔는데 할머니께서 선물을 하나 주시겠다며 손을 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머니를 뒤적뒤적 하시더니 환하게 웃으시며 동그랗게 잘 빚은 무언가를 제 손에 얹어 주셨습니다. 순간 미술치료를 하며 찰흙으로 뭘 만드셨나보다 했는데 냄새가…. 그 뒤로도 가끔 호호 할머니는 본인 기저귀에서 찰흙(?)을 채취하여 이불 속에서 몰래 몇 가지 작품을 만드셨습니다만 그때의 그 행복해 하시던 표정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날이 추워지면 꼭 생각나는 할머니 한 분이 있습니다. 병원에서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목욕을 시켜줍니다. 할머니는 목욕이라 하면 뜨끈한 탕에 몸을 푹 담궈서 때를 시원하게 밀어주는 것이라 생각하셨는데 병원에서의 목욕은 샤워에 가까워 성에 차지 않으셨나 봅니다. 면회 온 며느리와 함께 외출하셔서 몇 번 목욕탕 맛을 보시고는 흡족해 하셨습니다. 하지만 면회 올 때마다 부탁하시니 며느리도 버거웠는지 찾아오는 발걸음이 점차 줄어들고, 급기야 할머니는 회진 때마다 저에게 며느리에게 면회 오도록 전화 좀 해달라며 부탁을 하셔서 뭐라 말할 수 없이 안타깝고도 난처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평균 수명이 80세를 넘고 100세를 바라보며, 65세 이상 노인 10명 중 1명이 치매라는 시대에 이 할머니들 얘기는 어쩌면 우리의 얘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치매는 기억, 언어, 판단력 등 여러 영역의 인지기능이 떨어져서 일상생활에 상당한 지장이 나타나는 상태를 말합니다. 치매의 종류에는 뇌가 퇴화되며 발생하는 알츠하이머성 치매가 70% 정도, 뇌경색이나 뇌혈관 질환으로 인한 혈관성치매가 20%, 그외 루이소체 치매, 알콜성 치매, 가성 치매 등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치매라고 하는 알츠하이머병은 점진적으로 진행하며 비가역적입니다. 아직까지 병이 오기 전의 상태로 회복시켜주는 치료약은 없습니다. 그럼 치매 진단을 받았을 때 병원에서 처방해 주는 약은 어떤 것일까요? 약물치료는 경증의 상태를 오래 유지시키고 중증 치매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상 생활에 지장은 없지만 살짝 인지기능 장애가 있는 ‘경도 인지 장애’를 빨리 발견하여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치매에서는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인지기능 저하가 의심되면 인근 병원이나 보건소에 가서 비교적 간단한 선별 검사를 해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이상 소견이 있으면 치매 진단을 위해 신경심리검사, 뇌영상검사(MRI) 등도 함께 실시하게 됩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치료할 수 있는 원인 질환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뇌 MRI에서 뇌종양이나 정상압 수두증 등이 있는지 찾아서 치료해야 합니다. 또 노인의 우울증은 인지 장애를 보이는 치매와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우울증은 치매의 결과이기도 하고 원인 이 되기도 하며 치매로 잘못 진단되기도 하므로 주의하여야 합니다.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은 기존의 질환을 관리하고 가역적인 위험요인을 줄여서 치매를 예방하는 것입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알츠하이머병의 위험인자는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우울증, 불면증, 운동부족입니다.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은 뇌혈관 질환을 악화시킬 뿐 아니라 알츠하이머 치매의 경과를 악화시킨다고 합니다. 또 운동부족으로 인한 근육 감소와 노쇠, 영양 섭취 상태가 불량할 경우 치매 발생의 위험률은 더욱 증가합니다. 30분 이상 일주일에 3?5회 정도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의 강도로 걷는 유산소 운동과 계단 오르내리기를 하여 근력을 강화 시켜주는 것이 좋습니다. 책이나 신문을 본다든가 친구들과 하는 고스톱도 두뇌운동이 되겠지요.

 

지금은 몸도 마음도 내 맘대로 되지 않지만 두 할머니에게도 꽃같이 아름다운 시절이 틀림없이 있었겠죠. ‘화양연화(花樣年華)’ 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뜻한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화양연화는 언제였나요?

늘 아픈 청춘이었던 20대, 그저 바쁘게 달리기만 했던 30대를 지나 이제 드문드문 살아온 날들을 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4~50대를 지나면서도 불혹은커녕, 호르몬의 영향인지 또다시 질풍노도의 시기를 맞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나면 아프거나 고장 난 몸과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예고 없는 이별을 준비해야 하겠지요. 우리 인생의 행복한 순간은 어쩌면 찰나처럼 스쳐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루한 일상을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는 것만 같은 이 순간도 훗날 추억 해보면 참 행복했던 순간일 수 있을 겁니다.

 

초록이 울창한 푸르른 날의 성모당도 좋지만 겨울이 되어 앙상해지기 전에 저마다 온갖 색깔들을 끌어올려 형형색색 아름답게 물드는 11월의 성모당도 참 아름답습니다. 성직자 묘지 양쪽 기둥에 새겨진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Hodie mihi, Cras tibi)’라는 글귀가 위령 성월을 시작하는 깊어가는 가을녘에 더욱 눈에 띕니다. 그 내일을 향해 우리 모두는 달려가고 있지만, 아직은 심장이 뜨겁게 뛰고 계절의 눈부신 변화는 여전히 나이든 청춘의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많은 것들을 기억 속에 담아 둘 수 없는 그 시간이 다가오기 전에, 우리 인생의 가장 빛나는 화양연화의 순간이 아름답게 영글었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화양연화의 시간이 되도록 한없이 감사하며 기쁘게 오늘도 뚜벅뚜벅 걸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