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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온 편지
마지막 편지


글 심탁 클레멘스 신부 |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교구 선교사목

 

1. 이사

신부로 살면서 가장 부끄러운 순간들 중의 하나는 이사준비를 할 때입니다. 짐이 너무 많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랬다치고, 이곳 프랑스 선교를 시작한 후 네 번째(파리-콜마르-우쎈-오베 르네-베스트오펜) 이사를 하면서 보니 갈수록 짐이 늘고 있습니다. 앞만 보고 덤비고 들이대다 보니 수습하고 정리하지 못하는 약점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짐싸기를 도와주는 친구들에게 정말 부끄럽고 민망합니다. 그래서 ‘역 마살이 낀 내 인생, 노마드 여정’이라 자책합니다. 짬짬이 짐싸기 3주 이상, 본격적으로 1~2주, 그동안 너무 지치고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새 본당의 주간 업무들을 보면서, 또 주일 강론 준비 및 미사 등을 하면서 짐싸기를 하다보니 진도는 안 나가고 스트레스와 피로가 누적되어 기진맥진입니다. 암담하고 비참한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10월 25일, 짐 분류도 덜 했는데 예정된 이삿짐 센터가 들이 닥치고, 큰 차로 실어 날랐으나 무슨 짐이 그리 많은지 …  결국 최종적으로 10월 26~30일, 힘겹게 수호천사들과 삐에르 김 신부와 베스트호펜의 브느와(제의방 봉사, 38세)의 도움으로 이사를 마무리하고 옮겨온 짐과 쓰레기 정리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주님의 날이 어김없이 오듯 10월 30?31일 연중 나해 31주일(토요일 오후 6시, 주일 11시) 미사를 마치고, 숙소 앞 식당에 처음으로 발을 들입니다. La charrue d’Or! 겉보기에 선술집 정도인 줄 알았는데, 실내는 검정색 컨셉트로 장식되어 깔끔하고 세련된 분위기였습니다. 첫 인상으로 주방장 추천 메뉴와 백신접종 증명서를 제출하라는 글씨가 마음에 들었고, 그것마저 좋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문 오른쪽 2인석, 중년 남녀 두 사람의 테이블과 이웃하였습니다. 동양인에 대한 낯설고 어색한 눈빛이 중년 부인에게서 비칩니다. 입구 벽에 붙은 광고지를 보니 댄스 교습, 요가 강습 안내가 붙어 있습니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 ‘뭘 좀 할까?’ 생각하던 차에 요가가 눈에 더 듭니다. ‘요가, 오케이!’ 긍정 검토! 주 2회 매회 1시간으로, 3학기 중 학기당 90유로, 연 270유로이며, 협회비는 10유로!

 

문득 오베르네의 식당, 꽃집, 미용실, 빵집, 카페, 맥주집, 시청, 검도장, 가라데 도장, 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성당과 사제관, 그리고 길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 고 친교를 맺었던 모든 행위들이 ‘선교 활동’이었음을 선영하게 떠올렸습니다. 거부감, 경계심 혹은 관심과 염려를 가진 분들이 다양했습니다. 착각인지는 몰라도 직접 대면하면서 느낀 바, 그리스도교를 파괴하려는 세력들(전통적으로 공산주의 세력과 프리메이슨 등이 교회의 약점만을 과장하여 부각시키고 공격하는 문화)과는 다른 ‘긍정적 체험들’을 더욱 많이 하였습니다. 사실 지난 2년 동안 비록 투박하고 험한 졸필로 시간에 쫓기며 당시 현재 진행형 주제를 글로 쓰다보니 깊은 숙고 없이 선교의 어려움 위주로 독자분들에게 전달했던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숙성되고 세련되지 못한 글로 지면을 어지럽힌 점, 깊은 양해를 구합니다. 반면 소개하지 못한, 이른바 보람과 기쁨 가득한 이야기들도 많았지만 교만과 자만의 오염을 피하기 위해 절제해야 했습니다. “프랑스 교회의 이름없는 신자들은 훌륭하게 살아 있습니다.”

 

2. 선교!

선교를 떠나 올 때 한 친구가 걱정하며 말해 주었습니다. “너, 힘들어…그러다 죽어, 임마!” 당시 이태석 신부의 고귀한 선교 이야기와 그분의 죽음이 세계를 감동시키고 있던 중이었습니 다. 또 그 즈음, 신학교 입학 동기로서 참 좋아했던 친구가 해외 선교 중 뇌종양으로 급사하였습니다. 청주교구 신종섭 신부. 그는 아직도 가슴 속에 멍든 것 같은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또 어떤 선배는 저를 불러 하늘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합니다.

“탁아, 씨는 봄에 뿌리는 거란다. 그래야 가을에 열매를 볼 수 있다. 가을에 뿌려도 싹은 난다. 그러나 열매는 보기 어렵다. 무슨 말인지 알제?” 이런 여러 말씀이 귓가에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이 모두가 사랑을 담은 표현임을 압니다. 그러나 오히려 저는 나머지 인생을 선교에 투신하면서 이전에 알지 못하던 신앙의 기쁨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가장 중요시하셨고, 당신이 그렇게 사셨고, 죽었다가 부활하셔서도 승천 전에 남기신 말씀, ‘선교하라!’ 이 지고지순한 명령, 겨우 이제야 ‘행동으로 순종합니다.’ 선교 중 위기 때 마다 첫째, 광야로 떠나기를 다시 배웁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엘리야, 요한, 예수님까지 하느님과 대면의 시간을 철저히 가지셨던 점, 그것이 바로 나약한 인간 안에서 하느님의 힘을 퍼올리는 원리였음을 기억합니다. 거기서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생존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둘째, 모든 상황, 모든 사람들에게 제가 받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기-그분의 빛이 저를 통해 반사되게 하기에 집중합니다. 감히 제가 뭔데 어찌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겠습니까? 다 만 우리 모두 영적으로 죄인이며 환자이고, 또 모두를 예수님께 서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서도 죽기까지 사랑의 증거를 하셨으니, 저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기, 반사하기’에만 집중하려는 것뿐입니다.(강론, 대화, 고해성사, 면담 등에서)

 

〈빛〉잡지 모든 분들과 독자 여러분, 그간 감사했습니다. 저의 생활을 돌아보고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끝으로 2021년 10월의 마지막 날 점심시간, 식당에서 메모한 것을 몇 자 적어 올리며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선교사가 가는 곳은 모든 곳이 선교지다. 만나는 모든 사람은 선교 대상이며, 그리스도 사랑 증거의 대상이다. 내 눈에 최악의 조건도 나의 포기를 바라는 악마의 유혹일 뿐, 나의 약점에 스스로 무너지고 포기하면, 가장 기뻐할 존재는 마귀와 사탄일 뿐. 그리스도 없이 죄인이었던 나는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시작한 다. 남은 시간, 남은 체력으로! 마지막이라고 느낀 순간, 주님은 항상 나에게 상상치 못한 다른 세계를 보여 주셨다. 바로 그 순간까지 시간을 채우신 당신의 인내와 기다림이 먼저 있었다. 하느님의 현존, 당신이 주시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위로는 죄인이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 찬 선교사 로 돌변하게끔 용솟음치는 샘이다.

‘주님, 당신을 또 새롭게 알고부터 저는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두렵지 않습니다. 인간사에서 만나는 진퇴양난, 속수무책, 절체절명의 위기와 고통 속에서도 결코 당신께 원망이 생기지 않습니다. 당신이 이미 저에게 주신 것, 당신의 위대하신 사랑의 업적이 이미 저의 인생에 차고 넘치도록 각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저에게 선교의 첫 마음을 허락하신 것처럼, 당신 사랑 앞에 회개와 보속으로 세상에 무엇이라도 조금 저 자신을 내어 놓을 수 있게, 저의 작은 진심을 허락해 주십시오.’」

 

* 이번 호로 프랑스에서 온 편지는 끝맺습니다. 그동안 연재해주신 심탁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