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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골목신앙
12월 21일 크리스마스


글 이재근 레오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교수

 

원래 날짜보다 4일이나 빨랐지만 분명 그때 아기 예수님은 오셨다. 우리 가족을 위해서! 슬픔에 빠져있는 우리 가족만을 위한 크리스마스를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메리 크리스마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설레게 만드는 아주 멋진 말이다.

중국에서 사목활동을 할 때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 나라에서조차 곳곳에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는걸 보면서 지구에서 가장 멋진 날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 멋진 날이 이제 곧 있으면 우리 모두에게 찾아온다. 그래서 오늘은 매년 나를 설레게 하는 크리스마스지만 그 중 가장 기억에 남아있는 크리스마스에 대해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고 그해의 크리스마스는 세상 모든 사람들과 달리 우리 가족에게만 12월 21일이었다. 그 당시 아버지는 군무원이셨다. 군무원이란 군인과 함께 근무하는 공무원을 뜻한다. 아버지가 일하셨던 곳은 군대를 다녀온 남자라면 누구나 아는 대한민국 최고의 군 병원인 국군수도통합병원(현 국군수도병원)이었다. 국군병원 중에서도 가장 큰 곳이다 보니 심하게 다친 군인들이 하루에도 몇 명씩 들어오는 곳이었다. 당시 엄청난 신앙심을 가지고 계셨던 아버지는 병원에 들어오는 병사들과 장교들을 위해 매번 기도하고 그들을 만나며 시간을 보내셨다. 그러다 보니 친하게 지내게 된 병사들과 장교들이 꽤 있었다.

 

12월 21일 저녁이었다. 평소 퇴근이 저녁 7시인 아버지는 그날따라 9시가 넘어서 퇴근하셨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 손에는 조그마한 크리스마스트리와 트리 장식에 사용될 조그마한 전구가 들려 있었다. 트리와 전구는 24일 밤 우리 집 거실을 밝혀줄 용도였다. 평소보다 늦게 퇴근하신 아버지는 오늘따라 일이 많으셨는지 힘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늦은 저녁 을 드신 후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친하게 지내던 병사가 오늘 세상을 떠났다고 이야기하셨다. 그래서 병원 영안실에 있다가 지금 오는 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나와 동생에게 군인 아저씨를 위해서 잠시만 같이 기도하자고 말씀하셨다. 나와 동생은 마음이 아팠다. 하늘나라에 간 그 아저씨 때문에 마음이 아팠고 슬퍼하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는 게 마음 아팠다. 부모님 마음을 안 아프게 해드리고 싶었다.

 

바로 그때 크리스마스가 떠올랐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크리스마스만 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진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서 동생과 나는 아버지가 사 오신 크리스마스트리에 전구를 두르기 시작했다. 동생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적 감각이 떨어졌던 나는 미적 감각이 훌륭한 동생에게 모든 것을 전담시켰고 마지막 스위치는 내가 켰다. 엉성하게 감아서 그런지 뭔가 병든 크리스마스트리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어쨌든 지금 우리 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크리스마스였으니까…. 캐럴을 틀고 예수님께 예정일보다 4일만 빨리 와달라고 기도했다. 우리집은 지금 당장 크리스마스여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엉성한 크리스마스트리와 불빛을 바라보며 조용히 캐럴을 들었다. 시끌벅적하고 선물이 가득한 크리스마스는 아니었지만 부모님의 표정이 점점 행복하게 변했던 모습은 확실히 기억한다. 정말로 아기 예수님이 우리집에는 4일 일찍 오셨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 가족 은 그 해 12월 21일 크리스마스를 맞이했다.

 

기원전 3세기경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 인간에게 찬양받기 위해서가 아닌, 우리를 고통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오셨다. 모든 사람을 구원해 주기 위해 인간 세상 가장 밑바닥에 오셨다. 그리고 이제는 매년 성탄절이 될 때 마다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오신다. 온갖 고통으로 마구간이 되어버린 우리 마음에 당신께서 태어나신다. 우리를 고통에서 구해 주시려고 말이다.

 

신부가 된 지 15년이 지난 지금, 성탄절은 기쁨과 설렘이 가득한 날이기보다는 행사준비로 바쁜 날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 모든 행사가 끝나고 나면 이제 쉴 수 있다는 기쁨에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했다. 어렸을 적 내 가 느꼈던 그날이 아니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12월이 되었다. 그리고 곧 있으면 성탄절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도 아기가 되어 우리 마음에 오실 예정이다. 우리를 하루빨리 고통에서 구원해 주 시기 위해 4일 빨리 오실지도 모른다. 매년 똑같이 바쁜 성탄절이 아니라 아기 예수님 덕분에 치유와 행복이 넘치는 성탄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12월, 우리를 안아 주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며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