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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칼럼
아버지


글 허윤정 엘리사벳 | 통합의료진흥원 전인병원 가정의학과 전문의

 

얼마 전 저희 가족과 아주 가까이 지내는 가족으로부터 다급하게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바닷가를 산책하고 계단을 한참 올라가는데 조금 전까지 있던 남편의 모습이 보이지 않더랍니다. 뒤돌아보니 남편이 쓰러진 채 얼굴과 손발은 창백하고 의식이 없었답니다. 마침 간호사였던 아내는 아들과 함께 심폐 소생술을 하며 119를 불러 응급실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다행히 구급차 내에서 남편의 의식은 회복되었고 도착한 병원에서 응급시술로 막힌 혈관을 뚫어서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오셨지만, 그때를 떠올리는 이 순간에도 제 손에는 땀이 나고 심장이 마구 뜁니다. 이렇게 ‘나 간다.’ 소리 한마디 못하고 가는 것이 심근 경색 같은 관상 동맥 질환입니다. 돌이켜 보면 몇 달 전부터 한 번씩 가슴이 얹힌 듯 답답하기도 하고 찌릿하게 아플 때도 있었는데 협심증일까 하다가도 자주 그런 건 아니니까 괜찮겠지, 언제 한번 병원 가서 검사 해봐야지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천국 문 앞까지 갔다 올 줄은 모르셨죠.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전화를 받은 건 20여 년 전 제가 본과생이던 주일의 어느 날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나와 저녁미사를 마치고 친구들과 회포를 풀고 있을 때였습니다. 논에 물꼬를 보러 가신 아버지가 해거름이 지나도 오시지 않자, 큰오빠가 아직 덜 익은 벼이삭들 위로 쓰러져 계신 아버지를 찾아낸 것입니다. 책에서 본 협심증, 심근 경색증이란 것이 나에게 현실로, 죽음으로 이렇게 빨리 다가올 줄은 그때만 해도 몰랐습니다.

 

협심증은 동맥 경화증, 혈전증, 혈관의 연축 등에 의해 심장에 혈액을 공급하는 혈관인 관상 동맥이 좁아져서 생기는 질환입니다. 협심증은 관상 동맥이 좁아져 심장 근육에 일시적으로 혈류가 부족한 상태를 말하는 반면, 심근 경색증은 관상동맥이 막혀서 심장 근육의 조직이 죽는(괴사) 질환입니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운동을 할 때, 혹은 감정적 스트레스를 받을 때 가슴의 통증을 호소하는데 ‘가슴이 쥐어짜는 것 같다.’, ‘싸하다.’고 표현하시고 가끔은 ‘명치가 아프다.’, ‘가슴이 쓰리다.’고 표현하셔서 위장 질환으로 오인하여 진단이 늦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왼쪽 팔이나 어깨로 퍼지는 통증을 호소하기도 하고 ‘가슴이 답답하다.’는 증상만으로 오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통증은 5분 이내로 가라앉고 휴식을 취하면 완화되지만, 안정 시에도 통증이 생기거나 지속 시간이 길면 심근 경색증으로 진행 될 확률이 높은 상황이므로 즉시 병원을 방문해야 합니다. 당장 심전도와 피검사를 통해 심근 경색증의 가능성부터 확인합니다. 이들 검사가 정상이라고 해도 심장 초음파, 운동 부하검사뿐만 아니라 필요에 따라 관상 동맥 컴퓨터 단층 촬영(CT), 관상 동맥 조영술 등의 정밀 검사로 진단합니다.

협심증의 치료는 크게 약물치료와 협착이 심한 혈관을 넓혀주는 관혈적 치료로 나뉩니다. 점차 통증이 심해지거나 휴식 시에도 통증이 있는 불안정형 협심증은 약물치료와 함께 관상 동맥 확장 성형술이나 스텐트 삽입술 같은 중재시술을 합니다. 이 방법은 전신 마취 없이 할 수 있고 회복기간도 짧아서 최근 협심증 치료에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시술 후에도 스텐트 내에 혈전이 생겨 혈관을 막지 않도록 항혈소판제 등의 약물을 꾸준히 복용해야 합니다. 이러한 시술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한 경우에는 관상 동맥 우회술이라는 수술을 합니다. 그러면 협심증을 예방하고 관리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고혈압과 당뇨병의 관리를 철저하게 하고 금연을 하며 적절한 체중을 유지하는 것, 스트레스를 잘 관리하는 것입니다. 물론 콜레스테롤이 높으면 약물치료를 해야겠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금이라도 협심증이 의심되면 바로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는 것입니다.

 

항상 먼저 안부 전화를 하는 사람은 아버지였습니다만 그날따라 왜 그런지 유독 아버지께 전화를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몇 번이나 들었습니다. 도서관에서 공부의 흐름이 끊길까봐 미루어 두었더니, 급기야 친구들과 노느라 까맣게 잊어버리고 아버지와 마지막 통화의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내려가는 택시 안에서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이제껏 한번도 제대로 표현 못했지만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줄 모르고 떠나시면 안 되는데, 이제야 아버지가 조금씩 보이는데….

아버지가 누워 계셨던 논두렁에는 마흔을 훌쩍 넘어 얻게 된 막내딸을 예뻐라 태우고 다니시던 아버지의 오래된 자전거도 누워 있었습니다. 병든 노모를 수년간 지극 정성으로 수발한 외동아들이며, 초등학교 선생님이자 농사꾼인 7남매를 둔 가장. 이 구질구질한 수식어가 붙은 그 어디쯤에 내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무도 읽지 않는 두꺼운 책과 같은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그 안에는 수많은 생각들과 아직 햇빛을 보지 못한 기억들이 있지만 자식들 누구도 선뜻 그 책을 꺼내 읽어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재미없어 보이는 두꺼운 책으로 늘 그렇듯 책장에 꽂혀 있으려니 합니다. 사랑을 표현하는데 서툴렀던, 웃는 모습이 아버지를 꼭 닮은 딸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나버렸습니다. 이제 조금씩 아버지의 사랑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모든 아버지들 어깨 위에 군림하며,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기에 순순히 수긍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만드는 ‘아버지’라는 이름의 사명감과 외로움도 보이기 시작하는 참이었는데 말입니다.

 

여러분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표현이 떠오르면 그 자리에서 바로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가족들은 인내심이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르니까요.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