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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의 현장에서
저는 요양원 주일학교 신부입니다


글 허진혁 바오로 신부|사회복지법인 대구가톨릭사회복지회 차장

 

제가 근무했던 대구가톨릭요양원에 입소하시는 어르신들의 상당수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물론 종교가 없거나 타종교 신자이신 분들도 계시지만 아무래도 가톨릭교회 재단 시설이다 보니 천주교 신자 어르신들의 비율이 확실히 높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입소 상담을 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 어르신들이 가톨릭 재단 요양원을 선택하시는 주된 이유는 다름 아닌 ‘매일 미사에 참례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만 보더라도 어르신들이 지금껏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짐작이 갔습니다. 아마도 평생 신앙생활과 봉사활동을 해 오신 분들이시기에 생애 마지막까지 하느님과 함께하고 싶은 간절함 마음이 아닐까.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매일 미사뿐만 아니라 열심히 봉성체도 다녔고, 봉성체를 할 정도의 상황도 되지 못하면 매주 한번 안수기도라도 해 드리려고 했습니다. 건강 문제로 성시간에 참여하지 못하는 어르신을 위해서 아예 성체를 모신 성광을 든 채로 어르신이 계신 방으로 가서 성체 강복을 드리기도 했습니다.

4인 1실로 이루어진 방 가운데, 모두 가톨릭 신자 어르신으로만 구성된 방은 흡사 수도원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이미 제가 들어가기 전부터 아예 촛불을 켜 놓고 열심히 묵주기도를 드리고 있거나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런 분위기 때문에 저도 어르신들을 부를 때 애칭으로 “아이고! 우리 요양원 수녀님들”이라고 불러드렸었지요. 물론 가톨릭 신자가 아닌 분들도 계시기 때문에 당연히 예비신자 어르신들을 위한 세례반도 따로 운영했습니다.

요양원에서 하는 세례 교리반은 일반적으로 본당에서 실시하는 교리반과는 조금 풍경이 다릅니다. 대부분 고령의 어르신들이기 때문에 우선 귀가 잘 안 들리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핏대를 세워(?)가며 교리를 하다가 나중에는 목이 아파서 결국 마이크를 사용했습니다. 고작 두세 분을 코앞에 두고서 말이죠. 그리고 고령의 어르신들이신지라 아무래도 지난 교리 수업 내용을 잊어버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오죽하면 교리 기간 내내 성호경만 열심히 배웠던 분도 계실 정도였으니까요. 그럴 때는 할 수 없이 성호경을 중심으로 한 기본 4대 교리 수업을 매번 반복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저는 마치 어린이들을 데려다 놓고 수업하는 것처럼 최대한 간단하고 쉽게 교리 수업을 진행했는데, 보좌신부 때 주일학교 아이들과 함께하던 시절이 생각나서 웃음이 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상황이 그러하다 보니 어르신들이 교리 내용을 잘 이해하셨는지 내심 궁금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가끔 어르신들께서 저랑 눈을 마주치시며 고개를 끄덕여주시니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알아서 해 주신다고 믿고, 저는 그저 씨 뿌리는 농부의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집중했습니다.

한 가지 일화가 생각납니다. 신자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하는 봉성체 광경을 늘 옆에서 물끄러미 바라만 보시던 어르신이 계셨는데 한 번은 제가 그분께 여쭈었습니다. “혹시 어르신도 함께하고 싶으신가요? 천주교 세례를 받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제가 어르신을 위해서 교리반 수업을 해드릴 수 있어요.” 사실 고령의 어르신의 경우에는 새롭게 무엇인가를 시작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별다른 기대감은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건네 본 말이었습니다. “야야야!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어떤 유행가 가사처럼 세례에는 ‘적당한 때’라는 것이 없기도 하고요. 그런데 저에게 돌아온 대답이 놀라웠습니다. “고맙습니다. 저도 세례받고 싶어요.” 마치 그동안 물어봐 주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환하게 미소를 지으시는 어르신을 보면서 저 역시 얼마나 놀랐고 기뻤는지 모릅니다.

짧은 집중 교리 수업을 진행하면서 그분께서 저에게 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큰 감동으로 남아있습니다. 어르신께서 성당에 들어서면서 제단 뒤편의 십자가를 물끄러미 바라보시길래 무슨 생각을 그리하시냐고 여쭈었더니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 “예수님이 나를 위해 저렇게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놀라움을 넘어서서 숙연한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세례에는 정말 때가 없구나.’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되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건네 드린 말 한마디의 나비가 그야말로 어르신의 삶 속에서 영적인 폭풍을 불러일으킨 것이지요. 성령께서 그분의 영혼을 휘저어놓으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서로가 더욱 단절되어 가는 차가운 이 시대에 내가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 혹시나 싶어서 건네 보는 한마디가 그 말을 듣는 이에게는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릅니다.

세례에는 때가 없듯이 사랑에도 때가 없습니다. 가장 좋은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해도 될까? 언제가 좋을까? 그런 고민은 이제 그만두고, ‘바로 지금’ 한번 용기있게 실천해 보시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