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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의 생태 영성 살이
온 생명을 품어 기르는 어머니 땅


글 황종열 레오|평신도 생태영성학자

 

“한 하느님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이

서로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찬미받으소서』, 89항)

 

부모와 자녀가 하느님의 영 안에서 하나이듯, 온 창조물을 품고 있는 땅과 우리와 온 만물이 하느님의 창조의 영 안에서 하나를 이룹니다.

 

우리는 땅에서 와서 땅에서 나는 것을 먹고 살면서 땅의 친구가 되도록 불렸습니다. 여러분은 상대적으로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새 봄을 맞는 아름다운 때에 땅에서 나는 과일과 곡식과 채소에 감사하면서 우리 함께 땅에 대해서 성찰해 보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을 품어 기르시고,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업어 재우셨습니다. 예수님 역시 어머니의 품과 등을 기억할 것입니다. 요셉의 목마를 타고 어린 시절을 지내셨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어머니의 품과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자랐다면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런 체험보다는 아픈 기억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특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와 어머니이신 요셉과 마리아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면서 어머니이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생명을 선물해 주신 참 아버지이시자 어머니이시고, 예수님은 우리의 맏형이십니다. 기쁜 체험이나 아픈 체험을 갖고 있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느님과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과 하느님의 사랑을 보다 더 깊게 체험하면서 기쁨은 더욱 성숙시키고 아픔은 정화해 갈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나눔을 펼쳐 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성모님이 예수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품과 등으로 상징되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준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성장하여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어 자기를 내어 준다는 것은 화려하게 드러나는 일이 아닙니다. 성모님에 관한 기록이 거의 전해지지 않는 것이 상징적으로 말해 주듯이, 그것은 오히려 묻히고 잊혀지기 쉽습니다. 청소년기를 지나서 여학생의 경우 결혼하고 나서 출산할 때, 엄마로 탄생할 때, 그리고 남학생들은 아빠로서 양육비를 대고 자녀 교육으로 고뇌할 때, 좀 더 실질적으로 부모의 품과 등과 주름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어머니’, ‘아버지’를 불러보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연령과 무관하게 모든 시기 모든 존재에게 요청되는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물론이고 살아 계시다면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름을 직접 따뜻하게 불러드리는 일을 시도해 보는, 이것이 어려우면 기도와 미사 중에 불러드리는, 고귀하고 거룩한 기회를 마련하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어머니처럼 묵묵히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거나 감사를 표현하지 않아도 품어 주고 업어 주고 태워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기 전에 많은 것을 있게 하셨습니다. 빛이 생겨나게 하셨고, 바다와 육지를 갈라 제구실을 하게 하셨고, 온갖 식물과 동물들을, 그리고 바다 생물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것들은 사람보다 먼저 창조되어 사람이 살도록 바탕이 되고 바닥이 되고, 혹은 먹거리가 되고 협력자가 되기도 하며, 하느님의 메시지가 되기도 하여 우리의 스승 역할을 해 주기도 합니다.

창조 만물 가운데 특히 땅은 온 인류와 함께 세상 만물을 품어 줍니다. 오늘도 우리는 땅에 안겨 살고 업혀 삽니다. 우리는 땅을 밟고 우리의 길을 가고, 땅이 내준 열매를 먹으며 우리의 생명을 이어 갑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등과 품에서 놀았던 때가 있었어도 흔히 잊고 살 듯이, 땅이 우리에게 등이 되고 품이 되고 양식이 되어 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그렇게 바닥이 되어 주고 품어 주면서 길이 되고 생명의 원천이 되어 준 은혜를 오히려 파괴로 갚는 불효를 범하기조차 합니다.

어머니 마리아를 기억하는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우리의 생명의 터전이 되어 주는 땅을 다시 바라봅시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아 주심으로써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의 문이 열렸듯이 우리에게 곡식과 과실들을 내주어 생명의 충만을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땅의 사랑을 기억하며 감사합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 예수님을 품고 기를 사명을 주셨듯이 땅에게 온 생명을 품어 살게 할 사명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리면서, 온 땅의 모든 생명과 모든 존재와 함께 하느님을 보다 더 깊고 충만하게 찬양합시다. 이렇게 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욱더 아름답게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면서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땅을 다시 생각하고 존중하면서 우리에게 해 주는 모든 것에 감사한다는 것은 땅을 신격화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매개하는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듯이 땅이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고 그분의 사랑을 살 힘을 주는 데 대해서 땅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프란치스코 성인을 인용하면서 “지구-땅”을 “어머니요, 누이”로 표현한 데는 이런 깊은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찬미받으소서』, 1항)

이제는 따뜻한 마음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땅을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전령이자 “혈육상의 부모”와 함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생태적인 부모”로 바로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땅과 땅에 있는 모든 것과 함께 온 창조계의 대부모(代父母)이신 하느님께 찬양과 영광을 드리는 믿음의 효도를 실천해야겠습니다. 이것은 땅을 신성화하는 것이 아니라 땅과 “생태적으로 연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고 우리와 온 창조물의 참평화를 위하여!(루카 2,14 참조)

 

어머니 땅에 대해서 함께 나누었는데요, 우리에게 생명을 이어준 어머니와 우리의 존재를 연결해서 뇌의 작용에 관해 성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남자는 ‘씨’를 갖고 있고 여자는 ‘밭’의 역할을 하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 통하던 사회 단계에서 살았고, 지금도 그런 면이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과 같은 대신학자도 여자를 남자가 되려다가 실패한 존재로 볼 만큼 여자들에 대해서 무지한 면이 있었습니다. 제가 신학과 통합하기 위해 인간 발생학을 공부하면서 엄청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마음 아팠던 옛 사고방식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여자-밭’론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과학자들이 명확하게 입증한, 인간이 처음 한 생명으로 탄생하는 순간을 알면 말이 필요 없이 해소될 무지입니다.

여자는 단순히 밭의 구실을 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여자는 여자 고유의 씨-알-난자를 갖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될 한 여자의 난자는 자기 겉표면을 씨(알-정자)가 통과 한 후 문을 닫아서 정자를 보호합니다. 그런 가운데 자기 안에 들어온 이 정자가 다시 자기 막을 통과하게 합니다. 이 막 속에 도달한 정자가 꼬리를 떼고 23개의 염색체 쌍을 풀어서 23개의 홑염색체 상태에 있게 됩니다. 이때 역시 23개의 염색체 쌍을 풀어서 23개의 홑염색체 상태에 있는 씨(알-난자)가 원난자 속에서 생성되어 정자-씨와 난자-씨가 결합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가 된 수정체가 한 인간 생명의 시작이 됩니다.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하나의 세포를 이루는 이 모든 과정이 어머니가 될 한 여자의 난자 안에서 발생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수정이 이루어진 하나의 생명체를 안고 있는 그 난자가 자기를 낸 어머니의 나팔관에서 착상이 이루어질 자궁으로 이동해 갑니다.

자연의 섭리 안에서 정자가 난자와 만나지 못하면 인간 생명은 탄생하지 않습니다. 한 정자가 한 난자를 만나서 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바로 난자의 문이 닫힙니다. 그러면 정자는 다시 난자 안의 막을 통과하게 되는데, 이때 난자를 찾아오는 데 필요했던 꼬리가 떨어집니다. 알 형태가 된 남자의 씨는 난자 안에서 막을 지나서야 여자의 씨를 만나게 되는데, 이때 비로소 한 인간 생명이 어머니의 난자 안에서 하나의 세포 단계부터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난자 안에서 만난 남자의 씨와 여자의 씨가 어머니의 그 원난자 안에서 세포 분열을 해 가면서 이동하여 자궁벽에 착상되기에 이릅니다. 아버지가 될 남자는 씨를 내는데, 어머니가 될 여자는 씨는 물론이고 씨들이 만날 장을 마련해 주고, 이렇게 만난 씨들이 하나로 결합한 이후 생명으로 자라 갈 생명의 장-거룩한 생명궁을 제공해 줍니다.

어머니의 역할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단순히 밭이 아니라 생명의 수호자로서 열 달 동안 자기 난자 안에서 하나로 결합되어 자라기 시작한 이 생명을 품어 지켜 갑니다. 그런 속에서 마침내 때가 찼을 때는 자기의 꼬리뼈를 변형시키고 자기 골반 두덩뼈 결합을 풀어 가면서, 곧 자기 존재의 구조를 변형시켜 가면서 이 생명이 한 남아로서 혹은 한 여아로서 빛을 볼 수 있도록 매개합니다. 앞 호에서 아기의 유연한 머리뼈 구조에 대해서 보았는데요, 아기의 뇌는 바로 이 어머니 뱃속에서 안전하게 자라고 아기 머리 안에 형성되어 있는 뇌가 손상받지 않고 탄생할 수 있도록 어머니는 자기 뼈들을 변형시켜 가면서 산도를 넓혀 주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꼬리뼈를 뒤로 젖히지 않고 두덩뼈 결합부분이 떨어지게 해서 골반을 넓혀 놓지 않으면 아기는 태어나는 과정에서 머리에 충격을 심하게 받아서 뇌 손상을 입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집니다.

어머니들이 일반적으로 하느님께 더 가깝고 하느님의 생명 질서에 더 잘 응답하는 이유는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렇게 자기 존재를 건 어머니들의 생명 돌봄의 과정과 밀접하게 연결 되어 있습니다. 열 달에 걸친 어머니들의 이 돌봄과 섬김이 우리가 앞으로 살펴볼 뇌의 ‘기본 신경망(default mode network)’과 ‘마음 읽기 영역 (mentalizing regions)’의 작용의 핵심 근거가 됩니다. 또한 어머니의 뱃속에서 돌봄을 받는 이 과정이 우리가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하느님의 온 창조물과 동료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는 데 요청되는 기도와 영성 살이의 기준이 됩니다.

남자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존재의 근원과 연결되어있는 여자-어머니의 이 위대함과 숭고함을 잘 모릅니다. 어머니의 이 온유와 희생 없이는 존재할 수조차 없는 남자들이 여자들 앞에서 함부로 행동하고 큰소리치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슬프고 아픈 일입니다. 여자들을 겁먹게 하고 주눅 들게 하는 남자들, 여자들을 폭력으로 슬프게 하는 남자들은 그만큼 하느님의 생명 살림에서 멀다는 것을 말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어머니의 뱃속에서 열 달을 살다가 나온 모든 사람이 모든 어머니와 모든 여자 앞에서 이제 더는 교만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우리 존재의 핵, 뇌의 작용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 호부터 좀 더 본격적으로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