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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칼럼
세례명


글 허윤정 엘리사벳 I 통합의료진흥원 전인병원 가정의학과 전문의

 

세례명이 그대로 이름인 사람들을 가끔 만날 수 있습니다. 레오, 비오, 요한, 젬마, 로사, 보나, 리노, 안나…. 저희 6병동에는 푸릇푸릇 싱그럽고 동글동글하니 예쁜 얼굴의 ‘아녜스’라는 이름의 간호사가 있습니다. 식당에서 밥 먹을 때 성호를 그으면서 자연스레 가톨릭 신자임이 표시가 나듯, 아니 그보다 더 뚜렷하게 아녜스라는 이름의 명찰을 가슴에 달고 그렇게 불릴 때 속함의 느낌과 은총은 얼마나 클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병동 스테이션에서 종종 “아녜스!” 하고 큰소리로 불러보기도 합니다.

작년 봄에 아녜스가 머리가 아프다고 진료실로 왔습니다. 며칠 전부터 두통이 있어 타이레놀을 먹고 처음엔 좀 괜찮더니 연속된 야간 근무 탓인지 자는데 오른쪽 머리가 너무 지끈거려 깼다는 겁니다. 검사를 해보니 머리 CT는 이상이 없었지만 약을 먹고 주사를 맞아도 통증이 사라지지 않는 겁니다. 이 젊은 아가씨에게 별일이야 있을까 싶다가도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다음날 새벽 극심한 두통과 눈이 빠질 듯한 통증으로 응급실로 가서 머리 MRI도 찍었지만 이상 없으니 좀 지켜보자는 얘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짜잔, 이마로 작은 수포들이 올라옵니다. 드디어 일주일동안 아녜스를 괴롭힌 그 녀석의 정체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안구 대상포진’입니다. 눈 주위 얼굴의 부종과 강한 진통제에도 잠을 못 잘 정도의 찌릿한 통증과 시력저하는 입원해 있는 한동안 아녜스를 괴롭혔습니다.

대상표진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와 수두 바이러스는 같습니다. 과거 수두에 걸렸거나 수두 예방 접종을 한 사람에게는 수두 바이러스가 피부 신경절에 일생 동안 숨어 있게 됩니다. 그러다가 과로, 감정적 스트레스, 방사선 조사, 종양, 국소 외상, 만성질환 등으로 면역력이 떨어져서 바이러스가 재활성화 되어 나타나는 질환이 대상포진입니다. 흉추와 요추의 척수 지각 신경절, 삼차신경의 눈신경에서 흔하게 나타납니다. 최근에는 젊은이들에게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가장 강력한 발병 인자로는 ‘고령’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일생에 한 번이라도 발병할 가능성은 20~30% 정도로 추정되고, 50세 이후에는 발생률이 급속하게 상승하여 85세에는 평생 발생률이 50%가 된다고 합니다. 또 50세 이상, 여성,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이 동반된 경우나 한 달 이상 대상포진 후 신경통을 경험한 군이 재발도 더 많습니다.

처음에는 감기몸살처럼 기운이 없고 발열이 동반되기도 하고, 침범한 피부 신경절을 따라 찌릿한 통증이나 감각이상이 발생합니다. 비교적 젊은 분들은 피부가 좀 가려웠다는 정도로만 얘기하기도 합니다. 이때는 병원에 와도 대상 포진을 진단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예전에 시골에 있을 때 옆구리가 폭폭 쑤시고 아픈데 약을 먹어도 증상이 그대로라던 할머니께 혹시 그 자리에 조그만 물집이 올라오면 바로 병원으로 오시라고 단단히 말씀드렸습니다. 이틀 뒤 할머니는 작은 물집이 띠처럼 번져간다고 헐레벌떡 달려오셨습니다. 또 한번은 허리가 아프다고 오신 할머니, 겨울이라 몇 겹의 옷을 껴입고 계신 터라 옆의 대학병원 원장님이 춥다고 옷을 들춰 보지도 않으시고 진통제만 주셨나 봅니다. 주사도 맞고 물리치료를 해도 더 아프다고 찾아오셨습니다. “에헤이 어무이, 대상포진이네요!” 이 한마디에 한동안 할머니들 사이에서 ‘용한’ 의사 소리를 들었죠.

척추를 중심으로 몸을 반으로 나눴을 때 오른쪽이나 왼쪽, 어느 한 방향으로 옹기종기 모인 작은 수포들이 띠처럼 퍼져 있는 모습만 기억하시면 사실 대상포진을 의심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저는 대상포진으로 진단된 환자에게 꼭 세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첫 번째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대상포진은 면역이 떨어진 상황에서 발생한다는 것, 그래서 그럴 만한 질병이나 상황이 없다면 숨어있는 다른 병이 없는지 검사해 보아야 한다는 것. 두 번째는 대상포진이 유명한 건 대상포진 후 오는 신경통 때문이라는 것. 2~3주 후면 피부병변은 호전되겠지만 가끔은 신경통증만 남아서 한동안 고생할 수 있으므로, 피부 병변이 나타나고 72시간 이내에 가급적 빨리 항바이러스제를 투여해야 급성 통증의 기간을 줄이고 포진 후 신경통 발생을 줄일 수 있다는 것. 세 번째는 통상 1주간의 항바이러스제 치료로 대상포진이 호전되었다 하더라도 나중에 면역이 떨어지는 상태가 되면 또 재발할 수 있다는 것을 꼭 말씀드립니다.

 

대상포진도 수포에서 바이러스가 나와서 전염 될 수 있지만 대상포진으로 전염되는 것이 아니라 수두로 전염됩니다. 그러니까 수두를 앓은 적이 없는 사람, 특히 소아와의 밀접한 접촉은 조심해야 합니다.

아녜스처럼 안구를 침범하는 대상포진의 경우는 실명의 가능성이 있어 반드시 안과 치료를 함께 받아야 하고, 귀를 침범하는 경우는 심한 귀의 통증과 함께 안면 마비가 발생 할 수 있어 피부과의 응급질환입니다. 50세 이상에서는 대상 포진 예방접종을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대상포진 백신은 대상포진 뿐만 아니라 대상포진 후 신경통의 발생률도 감소시켜줍니다. 대상포진을 앓으셨던 분도 백신 접종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대상포진에서 회복된 아녜스 선생은 힘든 3교대 근무와 환자들과의 부대낌 속에서도 여전히 씨익 미소를 날리며 오늘도 묵묵하게 자신의 소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의 세례명은 엘리사벳입니다. 성당 활동을 통해 만난 분들은 저를 ‘엘리’라고 부릅니다. 장난기 많은 어떤 오빠는 “엘리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너를 찾으시더라.” 물론 그건 제가 아니고 하느님이지만(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엘리로 불리는 것이 참 좋습니다.

 

영성체를 할 때 저는 가끔 저금통을 떠올립니다. 저금통에 동전이 떨어지듯 제 몸에 성체가 하나씩 차곡차곡 쌓여가는 겁니다. 지금 내 몸의 어디까지쯤 예수님으로 차있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하면서 자리로 돌아오곤 하지요. 가득가득 채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조금이라도 배어나는 엘리이고 싶습니다.

 

* 이번 호로 ‘의학칼럼’은 끝맺습니다. 그동안 연재해 주신 허윤정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