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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에서 온 편지
몰라요, 몰라.


글 이수환 바오로 미끼 신부 | 카자흐스탄 알마티교구 선교사목

† Слава Иисусу Христу! (슬라바 이수수 크리스투 : 예수님께 영광)

◎ Во веки веков! (바 베키 베코브 : 세세 영원히)

 

카자흐스탄 신자들 사이에서는 위와 같이 인사한다고 지난번에 말씀드렸죠? ‘찬미예수님!’의 카자흐스탄 버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인사를 하고 나면 꼭 묻습니다. ‘Как дела?’ (깍 델라? : 어떻게 지내시나요?)입니다. ‘어떻게 지내셨나요?’, ‘식사는 하셨나요?’ 같은 안부입니다. 단순한 안부인사에서 좀 다른 걸 느낄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지내시나요?’ 라고 물었을 때 잘 못 지내고 있으면 좋지 않다고 이야기하거나 표정으로 표현합니다. 늘 좋다고만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다른 이들에게 잘 못 지낸다고 이야기하는 게 좀 어렵지 않나요? 물론 아주 친한 사이에는 가능하겠죠.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이에서 누군가 안부를 물었을 때는 잘 못 지내고 있더라도 잘 지낸다고 이야기하지 않나요? 저도 그랬고 또 그렇게 들었답니다. 못 지낸다고, 안 좋다고 이야기해도 괜찮지 않나요? 그죠? 좀 못해도 괜찮고 좀 안 좋아도 괜찮다는 것을 아주 단순한 곳에서 배우게 됩니다. 뭐든지 다 좋을 필요는 없다는 것을요.

 

벌써 우리의 만남도 세 번째입니다. 지난 이야기에서 카자흐스탄의 환경에 대해 말씀드렸죠? 슬슬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들려드릴 때가 온 거 같네요.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사실은 … 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보통 신부님들이 해외선교 나간다고 하시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현지인’들을 사목하기 위해 OOO 신부님께서 OO 나라에 가신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교포사목이라고 하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한국 인’들을 사목하기 위해 가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해외선교와 교포사목의 성격은 다릅니다. 따라서 둘을 구분하는 것은 필요하나 너무 심하게(?) 구분하여 서로를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은 우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을 필요로 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해외선교와 교포사목의 경계가 사라집니다. 제가 왜 경계를 허물려고 하냐면 지금의 제 상황이 그렇거든요. ‘해외선교인가, 교포사목인가?’ 라는 경계에 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곳에 선교사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의 언어를 배우고 환경을 배우고 이 나라말로 미사도 드리고 있고 신자들도 만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로 담당하는 일은 ‘한국어 쓰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어를 쓰는 신부님이 많지 않거든요. 제가 여기 왔을 때는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해외선교인지, 교포사목인지 명확히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생각 끝에 제가 하는 일을 이렇게 정의해 보았습니다. ‘선교사로 파견되어 보통 선교사들이 하는 일을 하며 거기에다가 한국어를 쓰는 공동체를 담당하고 있다.’ 라고 말입니다. 복잡하죠? 해외선교와 교포사목을 너무 심하게(?) 구분하는 분에게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렇지 않고 환경이 어떻든 똑같이 사목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에게는 예수님의 모습을 모든 분에게 조금이라도 보여 드리려 노력한다고 설명해 드립니다. 아쉽지만 이렇게까지 설명을 드려야 하는 분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보통은 해외선교? 교포사목? 이렇게 물어 보시거든요. 어떤 생각인지, 어떤 깊은 의미가 있는지와 같은 질문은 아직 받은 적이 없고,(개인적인 견해입니다만) 보통 그런 것에 별로 관심도 없어 보입니다. (너무 예민한가요?)

우리들은 쉽게 이분법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죠? 이거 아니면 저거! 모 아니면 도! 이렇게 생각하는 게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합니다. 두 부류의 특징을 하나하나 잘 파악한다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다른 쪽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마음이 좀 아픕니다. 두 가지의 특징을 잘 파악하면서도 너무 한쪽만을 고집하여 도저히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생각만 해도 만나기 싫지 않나요? 이야기가 자꾸 또 강론 비슷하게 흘러갑니다. 그죠?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려드리기 위해 또 다른 설명이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아무튼 저의 일은 이렇듯 좀 복잡합니다. 그래서 앞에서 ‘사실은 저도 잘 모르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제가 하는 일에 대해 조금은 감이 오시나요? 모르겠으면… 음… 와서 보셔요.

참! 저의 일도 일이지만 제가 왜 여기 오게 되었는지 들려드릴게요. 신학생 시절에 좋은 기회가 주어져 카자흐스탄이 아닌 다른 나라에 2년 동안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어떤 공동체였는데 그곳에서 아프리카 신부님들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그분들로부터 ‘뭔가 다른 아프리카의 에너지’를 느꼈지요. 신비적인 요소가 아닌 아프리카인들이 뿜어내는 그들만의 에너지 같은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외국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그 에너지가 너무 궁금했습니다. 아마도 그 생각이 저를 선교로 이끈 계기인거 같아요. 물론 선교 나가서 사목하시는 분들을 보면 멋있기도 했지만 사실은 앞선 생각이 제 마음을 훨씬 더 많이 차지했습니다. 엉뚱하지요? 사제품을 받기 전에 주교님과 면담 때도 아프리카 선교를 원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너무 엉뚱해서 그런지 기회가 바로 주어지지 않았어요. 하느님이 다른 곳에 쓰시려고 그랬겠죠. 교구 내 세 곳의 성당에서 보좌신부로 소임을 다하고 이동하려는 시기에 카자흐스탄에서 사제를 요청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졌습니다. 이미 선교 나가 계시는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수녀님을 통해 전해졌는데, 카자흐스탄에 한인들이 많아서 사제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프리카나 해외에 나가려는 마음이 ‘아직은’ 있었습니다. 다만 그때가 지나면 앞으로 자리가 있다 해도 제가 선택하지 않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바로 그때 요청이 들어온 것이죠. 그래서 바로 지원했고 드디어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한인들이 많아서 사제가 필요하다는 요청이었지만 카자흐스탄으로 나가게 될 때는 선교사의 이름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선교사 파견 미사도 했고요. 이렇게 보면 제 일의 시작부터가 모 아니면 도가 아니라 모도(모두)를 위한 일이었구나 싶습니다.

여전히 저의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하루하루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즐거움을 주기 위해 움직이고 있답니다. ‘이거 아니면 저거!’에 너무 에너지 쓰지 말고 다른 이와 구분 지을 수 있는 내 것을 잘 발전시켜 나가면서 하느님의 도구로 두루두루 쓰일 수 있게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모두들 건강 잘 챙기시고 다음 달에 또 만나요.

С Богом.(스 보감 : 신자들이 헤어질 때 하는 인사로 ‘주님과 함께’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