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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서 만나는 예수님 : 마태오 복음을 중심으로
부활(마태 28,1
-20),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글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로마에 위치한 교황청립 성서대학(Pontifical Biblical tostitute)에서의 유학 기간(2011년 10월~2020년 8월) 중인 2014년 9월 한 달간 이스라엘에 가서 ‘성서 고고학’ 수업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히브리어, 그리스어, 아람어, 시리아어, 곱트어와 같은 다양한 고대 근동어로 적힌 하느님의 말씀과 씨름하며 힘겨운 석사 과정을 보내고 있던 저에게,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성경에 나오는 여러 지명을 찾아다니면서, 성경의 현장에서 하느님 말씀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게 해 줄 성서 고고학 코스는 참으로 기대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주님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땅, 그야말로 진정한 ‘성지(Holy Land)’인 그곳에서 예수님의 호흡을 느끼고, 그분의 흔적을 찾고, 그분을 만날 수 있으리라 희망하며 저는 출발일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그날이 되어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서 이스라엘 국적기를 타고 이스라엘 텔아비브를 향해 떠났습니다. 그런데 당시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간의 긴장과 갈등은 극에 치달은 상황이었고, ‘가자 지구 분쟁 사태’(2014년 7월)로 인해서 2천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여 이스라엘 정국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공항 검색대를 거친 다음 탑승 전에, 저는 어디론가 이끌려서 보안 요원과 마주 앉아 일대일 면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엄격한 통제 아래, 마치 취조하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영어로 면담이 진행되었습니다. 검푸른 제복을 입은 보안 요원은 사십 대 중반 정도의 유대인 여성으로 보였는데, 첩보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날카롭고 냉정해 보이는 인상에 무표정한 얼굴이었습니다. 그녀는 저에게 몇 가지 질문을 연거푸 던졌습니다. 당신은 누구이며, 무슨 목적으로 이스라엘에 가는지, 어디에 묵는지, 또 언제까지 이스라엘에서 지내는지 등과 같은 질문이 추궁하듯 쏟아졌고, 제가 대답하는 과정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혹시 당신은 이스라엘에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저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네!(yes!)” 갑자기 보안 요원의 동공이 커졌고 의혹과 의심의 눈빛이 제게 집중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숨막히는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저는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지저스!(Jesus, 예수)” 저의 대답에 보안 요원은 소위 “빵” 터졌고 마침내 긴장을 누그러뜨리며, 본인도 ‘그 사람’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아주 유명한 분’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리고는 좋은 여행이 되기를 바란다는 인사와 함께 면담을 잘 마쳤습니다. 지나고 나니 엄격하고 조금은 ‘무서웠던’ 상황 속에서 순간적으로 제가 어떻게 이스라엘에 아는 사람이 있다고 대답했는지 참 우습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그렇게 대답했던 것은 그만큼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제가 아는 바로 그 예수님을 그 분의 땅 이스라엘에서, 나자렛에서,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에서 직접 만나 뵙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집어 삼킬 듯한 늦여름의 뜨거운 태양 아래, 인디아나 존스에 나오는 창이 넓은 모자와 등산화를 착용 한 채 날마다 흙먼지를 마셔가며 성경의 유명한 지명들을 두루 찾아 다니는 수업이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비록 몸은 매우 고되고 힘들었지만 학교와 도서관에서 배우고 공부하며 씨름했던 하느님 말씀을 현장에서 직접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어 참으로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한 달간의 과정을 마친 다음,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잠시 반나절의 자유 시간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혼자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거룩한 무덤 성당(Basilica of the Holy Sepulchre)’에 갔습니다. 무덤 성당 안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골고타 언덕에 세워진 경당과 그분이 묻히신 무덤에 세워진 작은 경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여러 개의 경당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성당 안은 순례객들로 붐볐고, 특히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무덤을 직접 보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무덤에 예수님께서 묻히셨지만, 물론 지금은 ‘빈 무덤’ 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무덤 경당이 마주 보이는 성당 구석에 쭈그려 앉아 이스라엘에서의 시간을 돌아보았습니다. 그 순간 한 가지 질문이 제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이스라엘에 오기 전에 나는 예수님을 안다고 했는데, 그래서 성서 고고학 수업을 통해서 그분을 만나기를 갈망했었는데, 그렇게 내가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예수님, 내가 직접 만나고 싶었던 그분을 나는 여기에서 만났는가?’ 예수님의 무덤 앞에 앉아서 꽤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다다른 결론은 안타깝게도 ‘나는 여기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구나!’ 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그토록 만나고 싶었는데 만나지 못했다는 슬픔이 저를 가득 채웠습니다. 마치 엠마오 이야기(루카 24,13-35)에서 스승이었던 예수님의 비참한 죽음을 겪고 침통한 표정으로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걸어갔던 제자들의 마음과 같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실망과 슬픔으로 탄식하며 이제 그만 숙소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우연히 무덤 성당 바로 옆 경당에서 이탈리아 신부님과 십여 명의 이탈리아 순례객들의 미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왔으니 그래도 미사라도 참례하고 가야지.’ 하는 마음에 슬쩍 신자석 뒤편에 앉아서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우연인지 아니면 하느님의 선물인지, 이탈리아 신부님의 강론 말씀은 마치 저에게 하시는 말씀인 듯 저를 매우 놀라게 했습니다. “하느님은 고고학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 말씀을 들었을 때 느꼈던 전율과 충격, 감동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그토록 공부하고 고민하고 또 갈망했지만 그분을 만나지 못했다고 느끼며 좌절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던 저에게 그 말씀은 참으로 ‘복음’, ‘구원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와서 그분께서 누워 계셨던 곳을 보아라. 그러니 서둘러 그분의 제자들에게 가서 이렇게 일러라.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마태 28,5-7)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초대교회 신앙 고백의 핵심이었고, 또한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주님의 천사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셨다는 놀라운 소식을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에게 전합니다. 그 여인들은 예수님을 따랐고 십자가 아래에서 그분의 죽음을 지켜보았으며(27,55- 56) 예수님께서 새 무덤에 모셔지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27,61)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그들은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28,1) 돌아가신 예수님께 아마도 향료를 발라 드리려고 갔다가(마르 16,1; 루카 24,1 참조) 천사로부터 이 같은 놀라운 소식을 듣습니다.

 

“평안하냐?”(마태 28,9)

 

이 소식을 듣고 그녀들이 서둘러 제자들에게 이를 전하러 가면서 느꼈던 감정은 두려움과 큰 기쁨이었습니다.(28,8: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마주 오시며 “평안하냐?”(카이레테) 하고 인사하십니다. ‘카이레테?’는 ‘안녕?’ 하는 그리스어의 인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뻐하다’(카이로)라는 의미이며, 8절에서 여인들이 느꼈던 큰 ‘기쁨’(카라)을 반영합니다.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표지입니다. 죽음으로부터 되살아나신 예수님께서 그분을 끝까지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이처럼 큰 기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루카 24,41; 요한 20,20 참조) 기쁨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필리 4,4)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이어지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표현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현현’을 발견합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께서는 자주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셨고(창세 26,24; 이사 41,10), 특히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이 표현과 함께 하느님의 현존으로서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 보이십니다.(마태 14,27; 17,7 참조)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며 두려움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당신 제자들에게 발현하십니다.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6-20)

 

28장 16-20절은 마태오 복음서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서 복음서의 신학적 종합이며 절정, 클라이맥스(climax)로 여겨집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의 권한(18절), 제자들의 사명(19-20 절 ㄱ),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 약속(20절 ㄴ)을 전합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곳이고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신 곳입니다.(4,15.18.23) 갈릴래아는 예수님을 체험하고 만나는 우리 삶의 터전이며 새로운 출발의 장소입니다. ‘산’은 예수님의 중요한 가르침이 전해지는 곳으로 예수님의 정체가 계시됩니다.(5,1; 17,1)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분으로, 제자들은 전능하신 주님께로부터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서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을 전하고 지키게 하는 사명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권한에 참여하며, 그 분의 진리를 선포하고,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널리 퍼뜨리는 임무를 부여 받습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 약속으로 끝이 납니다. 28장 20절의 예수님의 현존 약속은 1장 23절의 “임마누엘-‘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와 함께 수미상관(inclusio)을 이루며 마태오 복음서 전체를 감싸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제자들의 삶은 지금 여기에서 다시 새롭게 시작합니다.

 

* 이번 호부터 복음서에서 만나는 예수님을 집필하시는 이민영(예레미야) 신부님은 2008년 사제 서품을 받으셨고 로마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성서학 석사와 박사를 취득하신 후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로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