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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動)하다
“저기요, … 나 흰머리 났어요.”


글 김관호 리카르도 신부 | 수성성당 보좌

 

거울을 보면서, 매일 얼굴에 일어나는 작은 변화를 꼼꼼하게 살펴본다. 얼굴에 난 뾰루지를 보면서 소주에서 끝내지 못하고 맥주 한잔을 더했던 어제 저녁을 후회하기도 하고, 때론 면도를 해야 할 날짜를 계산한다. 그저 얼굴만 살펴보던 소박한 하루의 의식에 머리카락까지도 살펴야 하는 큰일이 벌어졌다.

 

흰머리가 나버렸다.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치가 분명하다고 생각해, 좁고 좁은 관계 속에서 그나마 나에게 호의적인 사람들한테 내 머리카락에 일어난 큰 변화를 보여줬다. 이 큰 변화가 새치라는 작은 소동에 불과한 것임을 동조해 주길 바랐다. 내 바람과 달리 그들은 나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다.

 

하지만 벌써 머리카락이 세어 버린 아버지의 형제들을 떠올려보면 이 변화는 거스를 수 없는, 누구의 탓도 아닌 당연한 것이었다. 꼼꼼히 살펴봤다. 앞머리에 한 가닥, 뒤통수에 한 가닥, 옆통수에 한 가닥씩 네 가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동서남북으로 자리 잡은 흰머리를 두고 신세를 한탄하려고 글을 쓰는 건 아니다. 흰머리라는 내 삶에 일어난 너무나 큰 변화를 마주하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누구의 탓도 아닌 당연한 것에 대해 생각한다.

 

부디 차도가 있길 바랐던, 병자성사 때에 만난 신자를 살아있는 모습이 아니라 영정 사진으로 다시 만나게 될 때.

 

언젠가는 가까이에서 함께 지내리라 다짐했던 동기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살아내기 위해 떠나갈 준비를 하는 것을 옆에서 바라보고 있을 때.

 

늘 나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었던 부모님에게 짜증을 내며 하나둘씩 알려주고 있을 때.

 

쉽게 마음을 내어줄 수 있었던 아이들에게 더 이상 깊게 다가갈 수 없음을 느끼고 있을 때.

 

그런 순간들이 조금씩 내 삶에 들어오고 있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누구의 탓도 아닌 당연한 것인 이별과 변화의 순간.

 

나는 그때를 생각한다. 나에게 다가온, 그리고 다가올 이별과 변화 앞에서 부디 흔들리지 않고 아무 일 없듯이 살아보리라 다짐한다. 수없이 다짐하고 또 아무 일 없이 평소를 살아가는 척해 본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흔들리고 아무 일 없듯이 살아내지 못한다.

 

이별과 변화가 싫다. 아니 흔들림이 없었으면 하고 내 마음과 감정을 가린 채 살아가는 것이 싫다. 눈가가 적셔지는 것은 호르몬 때문이라고 애써 나를 속이는 것이 싫어진다.

 

그래서 잘 모르겠다. 언제쯤 어른이 될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낼 수 있을지….

 

지금부터 시작하는 이 글은 흔들림의 기록이다.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서 있는 그 긴장을 켜켜이 풀어내는 그런 글이다. 멀리 떠나 가 버린, 그리고 내가 떠나온 수많은 사람과 시간, 그리고 사건에게 ‘나 흰머리가 났어요.’라고 말하고 싶은 내 마음, 애써 감추고 싶지만 마음이 시키고, 마음의 울림으로 쓰게 된 그런 글이다.

 

“저기요, … 나 흰머리 났어요.”

 

* 이번 호부터 ‘동(動)하다’를 집필하시는 김관호(리카르도) 신부님은 2019년 사제서품을 받고 현재 수성성당 보좌로 사목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