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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 까말돌리한국수도원장 최 마르타 수녀
모든 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취재 박지현 프란체스카 기자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 진출한 까말돌리수도회는 대구대교구 내 황점 지역에 까말돌리한국수도원을 세웠다. 지난 5월 12일(목) 교구장 조환길(타대오) 대주교의 주례로 수도원 임시숙소와 경당 축복미사가 봉헌되었다. 이번 달 ‘만나고 싶었습니다’에서는 까말돌리한국수도원장 최 마르타 수녀를 만나보았다.

까말돌리수도회는 1012년 로무알도(Romualdus) 성인이 이탈리아 아레초 까말돌리 지역에 설립한 남녀 연합회 은수수도회이다. 베네딕도 총연합회 소속으로 은수자와 수도자가 공동생활을 하는 특별한 공동체다. 고행하면서 영성의 삶을 살아가는 은수자 공동체를 까말돌리, 은수자들의 삶을 도와주며 노동의 삶을 살아가는 수도자 공동체를 폰테 아벨라니라고 한다. 수도회는 은수자와 수도자의 화합을 강조하며 장상에 대한 순명, 공동체 의식, 하느님과의 일치라는 공동의 목표를 중요하게 여긴다. 지금도 까말돌리 지역의 1100m 고지에 은수수도원이 있는데 성 로무알도 은수 규칙서에 따라 세상의 불빛이 보이지 않는 곳에 수도원이 위치해야 한다. 이것은 세상의 작은 불빛으로 인한 마음의 혼란을 막고, 외부인의 수도원 방문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평생 동안 영성의 길로 가는 삶에 있어서 나태해지지 않도록 조금 추운 환경인 해발 700m 이상에 건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최 마르타 수녀는 “기도생활하는 방법에 따라 은수자, 독수자로 표현하는데 은수자는 한 독채에서 혼자 채소밭이나 정원을 가꾸면서 기도 생활을 하는 것으로 공동기도와 미사를 한다. 독수자는 욕실과 침대, 책상 정도가 있는 방 한 칸에서 독수생활에 들어가면 밖에서 문을 잠그고 주님께 돌아가는 그날까지 오로지 기도만 하면서 지내는 것이다. 식사는 방 안으로 넣어주고 한 달에 한 번 고해성사를 본다.”면서 “은수생활을 하면서 풀 한 포기에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할 때가 있는데, 아직도 내가 피조물을 통해 하느님을 만난다는 사실에 영적 부족함을 느끼며 독수생활을 청한다. 은수자라면 누구든지 하느님과 일치하며 살아가는 독수자가 되는 것을 소원하지만 쉽지 않다. 까말돌리 수도회에서만 독수생활을 허락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도 남성독수자는 종종 있지만 여성독수자는 2019년 이후로 나오지 않고 있다. 까말돌리수도회의 대표적인 여성독수자는 이탈리아의 독수처에서 42년 동안 독수(獨修)생활을 했던 나자레나(미국인, 1907-1990) 수녀인데 한국에 엄격한 여자은수수도원 설립을 염원하는 기도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최 마르타 수녀는 “나자레나 수녀님은 그 당시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나라인지 전혀 모르셨지만 당신의 고해 신부님께 그 뜻을 꾸준히 전하셨다. 이 모든 것은 성령께서 인도하심이라 짐작되며, 6.25전쟁 때 나자레나 수녀님의 기도로 많은 분들이 구원받았으리라 추측해 본다.”고 했다. 나자레나 수녀가 지냈던 방은 로마 아벤띠노 언덕 산안토니오 까말돌리수도원 안에 있는데 방문객을 위해 개방하고 있다.

2012년에 창립 1000주년을 맞은 까말돌리수도회는 전 세계 33곳 남녀연합회 320여 명의 회원이 한자리에 모여 다양한 행사를 마련한 가운데 투표를 통해 아시아 첫 진출지로 한국이 결정됐다. 그렇게 한국수도원장을 맡게 된 최 마르타 수녀는 2014년 11월 30일 한국에 도착했다. 수도회에 입회하는 순간 다시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겠다며 주민등록을 말소시키고 떠났던 최 마르타 수녀는 주민등록부터 갱신해야했다.

수도회에 입회하게 된 계기에 대해 최 마르타 수녀는 “직장생활을 하던 중 큰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병원에서 ‘주님, 왜 나만 살리셨나요?’ 하고 울부짖으며 깨어났다. 사고 후 하늘나라에 대한 묵상을 하며 아버지 신부님께 상의했더니 전혀 생각지 못했던 수도 성소, 특히 은수수도회를 권유하셔서 알려주신 두 곳 중 하나인 까말돌리수도회에 입회하게 됐다.”면서 “굳은 결심으로 떠났기에 일 년이 채 되지 않아 모친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지만 세상 어머니를 멀리하며 끝내 한국에 오지 않았고 한국수도원 진출로 처음 오게 됐다.”고 했다.

모든 일의 시작이 그러하듯 까말돌리한국수도원의 시작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설립 과정이 너무 힘들었던 만큼 주님께서 가난은 겸손의 어머니임을 친히 실천케 해주셨다.”는 최 마르타 수녀는 “앞으로 새 수도원을 지어야 하는데 어디에 사느냐 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까말돌리수도회에서 현재 여자은수수도원은 네 군데(이탈리아, 한국, 콜롬비아, 폴란드) 뿐인데 대구대교구에 머물게 된 것은 하느님의 뜻이며 나자레나 수녀님의 기도를 주님께서 이루어 주셨음이라 믿는다. 영성이 두 발을 디뎌야 그 위에 집을 지을 수 있기에 선조들의 신앙의 뿌리가 있는 이곳 황점에서 하늘나라를 이루도록 한국수도원에 있는 은수자들이 기도하고 흠숭하고 찬양하겠다.”고 했다.

까말돌리한국수도원에서 지내고 있는 여섯 명의 수녀는 오늘도 고대 은수수도회의 규칙에 따라 자정에 기상해서 저녁 7시 30분에 취침할 때까지 기도, 미사, 대침묵, 영적 독서, 관상기도로 채워진 일과를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