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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마당
묵주기도의 신비 묵상


글 오숙연 세실리아 I 욱수성당

 

가톨릭 신자와 타 종교 신자가 다른 점은 아마도 몸에 묵주를 지니고, 또 묵주기도를 바친다는 점일 것이다. 많은 신부님께서 “묵주기도는 참으로 좋은 관상기도이고 악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가장 힘있는 무기”라고 말씀하시는데 문제는 각 단의 신비를 제대로 묵상하고 정성을 다해 바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마음을 가다듬고 정성을 모아 제대로 묵상도 하면서 시작하지만 어느 순간 마음이 이곳저곳을 헤매기 시작하고 돌아와 보면 손가락은 어느새 5단의 끝자락에 와 있다. 다시 신비를 묵상하지만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언젠가 어떤 수녀님이 꿈에 성모님께서 누더기를 걸치고 나타나셔서 깜짝 놀라 여쭤보니 “얘야, 네가 바친 묵주기도로 지은 옷이란다.”라고 말씀하셔서 크게 반성한 후 제대로 바쳤더니 다음에는 아름다운 옷을 입고 나타나셨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 생각을 하면 늘 성모님께 송구하기만 하다.

그런데 얼마 전 우리 성당에서 부제님의 강론을 듣고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날 복음은 요한복음 2장으로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시는 예수님의 기적이야기였는데 강론 말미에 부제님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셨다. 19세기 영국의 시인 바이런이 대학시절 종교학 시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예수님의 기적에 대하여 논하라.’는 문제를 받은 적이 있다. 모든 학생이 열심히 답을 써 내려가고 있는데 바이런만 창밖을 바라볼 뿐 한 자도 쓰지 않고 있었다. 보다 못한 감독관이 “백지를 내면 학사 경고를 받을지도 모르니 조금이라도 써라.”고 충고를 했지만 바이런은 여전히 어떤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다가 마지막에 한 줄을 쓰고는 고사장을 빠져나갔다. 이 한 줄의 답안지가 이 대학 창립 이후 전설이 된 만점 답안지였다고 하셨다. 답안지의 내용은 “물이 제 창조주를 만나 얼굴을 붉혔네!” 였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은 200여 년 전인데 나는 이제야 접하게 되었다. 그날 이후 감흥 없이 바치던 묵주기도 ‘빛의 신비’ 2단을 바칠 때면 어느새 내가 항아리에 가득 담긴 물이 되어 저를 지어내신 예수님을 만나 뵙고 기쁨에 겨워 벳자타 못의 물처럼 출렁이다가 발그레 홍조를 띠고는 향기로운 포도주로 변해가는 환상에 빠지곤 한다. 신부님께서 여러 번 말씀하셔도 나는 이때까지 관상기도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어쩌면 관상기도를 이해하는데 한 발 다가간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태백을 시선(詩仙)이라 하고 인도의 시인 타고르를 시성(詩聖)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 보면 위대한 시인이란 하느님과 좀 더 가까이 있는 존재로서 하늘나라의 신비를 꿰뚫어 보는 능력이 우리 평범한 사람들보다 뛰어난 사람인가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