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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


글 최성준 이냐시오 신부|월간 〈빛〉 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그리스 신화를 읽다 보면 오늘날 우리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많아 신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대가 바뀌고 문명이 발전해도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태도에는 별 차이가 없나 봅니다. 신화의 형식으로 표현한 인류의 삶의 지혜가 수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에게도 전해집니다.

그리스 신화에 프로크루스테스라는 포악한 강도가 있습니다. 그는 아테네 근처 강가에 여인숙을 차려 놓고 손님이 오면 극진히 대접하며 잠자리를 제공합니다. 그러고 나서 모든 이에게 맞는 침대가 있다며 손님을 쇠 침대에 눕힌 다음, 침대보다 키가 크면 크기에 맞게 다리나 머리를 잘라내고 작으면 몸을 잡아 늘여서 죽였습니다. 정말 포악하기 이를 데 없는 강도지요. 훗날 프로크루스테스는 영웅 테세우스에게 똑같은 방법으로 죽임을 당합니다. 이후로 자신의 원칙이나 기준을 막무가내로 고집하면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억지로 자신에게 맞추려는 태도를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고 표현합니다.

신화에나 나오는 이런 포악한 괴물의 모습이 사실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고 절대적인 윤리 기준도 인정하지 않는 많은 현대인은 '자기 자신’을 유일한 잣대로 여깁니다. 이들의 생각이나 의견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원칙만을 강조하며 다른 사람을 재단하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위험한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두 공감하는 것 같습니다. 『장자(莊子)』에도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긴 것을 여분이라 여기지 않으며, 짧은 것을 부족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런 까닭으로, 오리 다리가 짧다고 그것을 길게 늘여 준다면 괴로워하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그것을 자른다면 비통해 할 것이다.” 1)

 

결국 판단은 내가 하는 것이지만 그 판단이 공정하고 올바른 판단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나의 잣대는 무엇인가?’ 나와 우리에게 적용할 때는 고무줄처럼 늘어나지만 타인에게는 엄정하게 적용한다면 그 잣대는 올바르지 않을 것입니다. 쉽게 판단하고 혼자 상상해서 내 생각을 덧붙여 남들에게 전한다면 나는 프로크루스테스와 다르지 않은 괴물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판단 기준으로 삼고, 성찰과 반성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타인의 의견에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세계주교시노드가 한창 진행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권고하십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귀를 기울입시다. 그리고 모든 이가 성령께 귀를 기울입시다.” 시노드의 첫 번째 정신이 바로 ‘경청’입니다. 경청은 아무 생각 없이 남의 소리를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고 깊이 공감하려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체적인 나의 기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기준은 나만의 아집이나 편견이 아니라 주님이 가르쳐 주신 ‘사랑’이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1) 『장자(莊子)』, 「변무(耐梅)」,3. “長者不爲有餘, 短者不爲不足. 是故鳥經雜 短,續之則憂. 鶴腫雜長,斷之則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