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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회칙으로 배우는 사회교리
제4장, 온 세상을 향하여 열린 마음(1)


글 박용욱 미카엘 신부|교구 사목연구소장

 

영역 지키기

유럽의 한 동물원에 천산갑이라는 동물이 처음 들어왔을 때 이야기입니다. 난생 처음 보는 동물을 수입해 왔으니 극진히 보살핀 것은 당연했지요. 먹이와 물을 충분히 주고 우리도 청결하게 관리했습니다. 그런데 천산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체로 발견되고 맙니다. 부검 결과는 뜻밖이었습니다. 심한 탈수로 죽었다는 겁니다. 물을 안 준 것도 아닌데 왜 탈수 현상을 일으켰을까요? 답은 천산갑의 영역 표시 본능이 대단히 강한 것에 있었습니다. 천산갑은 오줌으로 자기 영역을 표시하는데, 동물원 측에서는 귀한 동물이 오줌을 눌 때마다 바로바로 청소를 해 버렸던 거죠. 온몸의 수분을 짜내서 필사적으로 자기 영역을 표시하려던 천산갑은 결국 탈수로 죽었습니다. 자기 영역을 지키려는 본능이 얼마나 강한지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사례입니다.

 

인간도 생물인지라 영역을 지키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하철에서 비어 있는 다른 자리를 두고 하필이면 내 옆에 낯선 사람이 앉을 때 느끼는 불편함을 떠올려 보십시오. 누구든지 자기 영역을 어느 정도 필요로 하고, 안정된 삶을 추구하는 것도 자기 영역을 침범당하지 않으려는 노력일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영역에 대한 애착이 지나쳐서 집착이 되면, 우리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내 영역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 내 것을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굳은 마음은 우리 삶의 중요한 한 면을 가려 버리고, 남을 막으려고 세운 장벽에 도리어 자기를 가두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회칙 모든 형제들」 4장에서 말씀하시는 난민 문제, 더 넓게는 이주민 문제가 그런 예입니다.

 

난민 문제에 대한 대응

통계청이 제공하는 통계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으로 전 세계 난민은 2,635만 명에 이릅니다. 원래 난민 문제는 1917년 러시아 혁명과 제1,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유럽을 중심으로 벌어진 현상이어서 우리나라와는 크게 관계가 없었습니다. 물론 한반도 역시 단일 민족 국가라는 통념과 달리 다양한 민족이 섞이고 흥망성쇠를 겪었던 공간입니다만, 최근까지 대다수 사람들은 단일 민족, 단일 문화라는 정체성을 받아 들이고 있었지요. 외국인을 볼 일도 그만큼 적었습니다.

그런데 세계화와 기후 변화 때문에 살 길을 찾아 고국을 떠나 새 거주지를 찾는 발길이 대폭 늘어나면서 난민 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퍼져 나갔고, 또 한국이 문제 해결에 기여할 능력과 위상을 가지면서 난민 문제를 더이상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기존에 난민을 받아들이던 국가들이 빗장을 잠그고 있는 추세라서 대신 우리나라를 향하는 이들도 늘어납니다. 미국은 감염병 사태 속에 연방 공중 보건법(Title 42)을 통해 난민을 막고 있고, 유럽도 역내 국가 간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던 솅겐 조약을 수정하고 아프리카 인접국에 지원금을 주면서 난민 유입을 억제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나라의 경제적 위상에 맞게 이 문제에 대해서 일정한 역할을 해 주기를 바라는 압력도 높아집니다.

 

우리나라의 난민 대응

지금껏 우리나라는 난민 수용을 몹시 억제해 왔습니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매년 1조원 가량을 공여하는 나라로 돌아섰고,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난민을 받아들이는 데는 대단히 인색합니다.

우리나라 난민법 2조 1항은 ‘난민을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인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다고 인정할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보호받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외국인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대한민국에 입국하기 전에 거주한 국가(이하 “상주국”이라 한다.)로 돌아갈 수 없거나 돌아가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무국적자인 외국인’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난민법이 근본적으로 난민을 내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려는 법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 법의 보호를 받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출입국 외국인 정책본부 통계에 따르면 1994년부터 2021년 11월까지 누적 난민 인정 신청 건수는 73,185건이며, 누적 난민 인정 건수 1,141건, 인도적 체류자 인정 건수 2,409건으로 전체 난민 인정 비율 평균은 2.8%에 불과합니다. 2021년 경우에는 난민 인정 비율이 0.7%로 더 떨어지지요. 유럽이 난민 수용을 꺼리면서도 41%에 육박하는 1차 난민 인정 비율을 보이는 것에 비하면 매우 박한 처사입니다. 지난 2018년 예멘 난민 사건을 계기로 난민 수용 반대 여론이 높아졌고, 대구 북구의 이슬람 사원 신축을 둘러싼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도 걱정스럽습니다. 

이렇게 자기 영역을 지키겠다는 태도를 단순히 지역 이기주의로 몰아붙이거나 인권의식이 빈약하다고 폄훼할 일은 아닙니다. 인간의 본능에 대한 문제면서 대단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복음의 빛 안에서 진지하게 성찰해보고 사려 깊은 대화를 나눠야 할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삶의 무상성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우선 난민이나 이주민들에 대해서 공리주의적인 태도로만 판단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고 지적하십니다. 외부인들이 우리 지역에 들어오게 될 때 어떤 득과 실이 있는지만 따지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는 것 입니다. 그보다는 삶의 무상성에 대해서 깊이 성찰할 것을 권고하십니다. “무상성은 개인적 이득이나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다만 그 자체로 좋은 것이기에 어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무상성은 우리에게 즉각적이고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이방인을 환대 하도록 합니다.”(「모든 형제들」, 139항)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우리가 노력해서 성취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감수 해 가면서 애를 씁니다. 그리고 그 노력에 대해서 정당한 댓가를 받게 될 때 공청하다 혹은 정의롭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런 공정함은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요소이면서 함께 추구 해야 할 소중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우리 삶은 인간적인 공정함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또 다른 측면을 품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생명을 하느님께 거저 받았다는 것이지요. 자신의 소유를 늘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성취할 수는 있어도, 자신의 생명 자체를 발생 시킬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어린 생명이 어엿한 성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도, 또 사회 속에서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도, 그리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과정에서도 우리 모두에게는 결코 셈할 수 없고 대가를 정확하게 치를 수 없는 은총이 개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십니다.”(마태 5,45) 내 생명, 내 삶이 근본적으로 하느님께서 거저 베풀어 주신 선물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모든 관계를 상거래 하듯 따지고 드는 좁은 시야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동물적 본능을 넘어 보편적인 형제애로 고양될 수 있는 것도 이 무상성을 깊이 깨닫고 행동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한번을 안 지려는’ 타산적인 태도가 횡행하고, 양보와 희생을 경원시하는 삭막한 곳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거저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과 내가 셈을 치를 수도 없는 수많은 호의와 도움은 생각지도 않고 매사에 득실을 따지는 까탈스러움이 우리를 우울하게 합니다. 삶의 무상성은 그런 점에서 우리가 먼저 짚어봐야 할 신비입니다. 이 신비를 토대로 다음 호에서는 난민과 이주민 문제에 대해서 우리 사회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