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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성월을 맞이하여 - 대구대교구 ‘하느님의 종 5위’ 시복시성운동
대구대교구 ‘하느님의 종 5위’ 시복시성운동


글 편집부

 

한국천주교회는 조선 왕조 치하에서 순교하신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베네딕도회 덕원의 순교자 38위(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와 동료 37위)’, 그리고 ‘가경자 최양업 신부’의 시복을 준비하고 있다. 대구대교구는 이 가운데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포함된 순교자 김흥금(23번), 김장복(24번), 안치룡(25번), 서태순 베드로(82번),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114번)의 시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괄호 안의 번호는 시복청원대상자에 대한 임의 번호로 순교일자순으로 되어 있다.)

순교자의 시복과 시성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찍이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8월 16일 광화문에서 거행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 강론의 서두에서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로마서 8장 35절을 인용했다. 그리고 교회는 순교자의 피로 성장한다는 테르툴리아누스 교부의 말을 기억하면서 “순교자들의 승리, 곧 하느님 사랑의 힘에 대한 그들의 증언은 오늘날 한국 땅에서, 교회 안에서 계속 열매를 맺습니다.”라며 우리가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르면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믿는다면, 우리는 순교자들이 죽음에 이르도록 간직했던 그 숭고한 자유와 기쁨이 무엇인지 마침내 깨닫게 될 것이라고 했다.

순교자가 시복되고 시성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을 조명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그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떠한 삶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깨달았으며 그것을 삶으로 어떻게 풀어냈는지 찾아봐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며 반성하게 되고 우리 역시 신앙 선조들의 삶을 본받는 신앙인이 되고자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보통 순교자라고 하면 우리는 하늘에 떠 있는 해님과 달님처럼 우리가 스스로 바라보기 힘든 사람들, 아니면 우리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던 사람들,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순교자들은 어떤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웃고 울며 살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고 노력했고, 때로는 하느님을 저버리라는 유혹에 온 마음으로 저항하며 살았던 사람들이다.

특별히 대구대교구의 ‘하느님의 종 5위’는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드러나지 않는 조용한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흥금과 김장복은 진보 머루산 교우촌에서, 안치룡은 청송 노래산 교우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1815년 을해박해 때 붙잡혀 경상감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다가 옥중에서 순교했다. 그래서 이 세 분의 순교자는 정확히 언제 돌아가셨는지 알 수 없다.

서태순 베드로는 부모님의 가르침으로 신앙을 살며 어려서부터 이곳저곳으로 피신을 다니며 생활했다. 1860년 경신박해 때 붙잡혀 문초와 형벌을 받다가 고통스러운 옥살이에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그 이후 교회를 멀리하다가 다시 회심하여 대구를 떠나 가족들과 함께 문경 한실 교우촌으로 이주해 신앙생활을 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붙잡힌 서태순 베드로는 상주진영으로 이송되었다가 1867년 1월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시신은 조카인 서상돈 아우구스티노가 한티 교우촌까지 직접 이송하여 안장했다.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어렸을 때 병을 앓아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가 천주교를 알게 된 것은 16세가 되던 해였고, 천주교를 알게 된 이후 홀로 동정으로 살아갈 결심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해 나갔다. 이후 재산 가운데 일부를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한티 교우촌으로 이주한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농사를 지으며 교회 서적을 필사하고 신자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고 묵상과 기도 생활에 열중했다. 또한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아 고신극기에 열심이었다.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병인박해 때 붙잡혀 압송된 서울 포도청 포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도 했다. 결국 1868년 포도청에서 30세의 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다섯 분의 순교자 중에서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처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분도 있고, 김흥금, 김장복, 안치룡처럼 처형되기 전 병사해서 세례명과 순교 날짜에 대한 기록이 없는 분도 있다.

제대로 알려진 것 없이 단 몇 줄로 삶이 전해지고,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초봄의 눈처럼 아침 이슬처럼 조용히 사라져 갔지만 대구의 ‘하느님의 종 5위’는 오로지 하느님만을 바라본 분들이었다.

요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고, 많은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살아간다. 기도할 시간도, 잠시 하느님을 바라볼 시간도 없다고 한다. 사실 필요한 것은 오직 한가지 뿐인데 우리는 불필요한 것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