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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회칙으로 배우는 사회교리
제5장, 더 좋은 정치(1)


글 박용욱 미카엘 신부|교구 사목연구소장

 

정치와 품위

요즘은 다르겠지만 예전에 예비군 군복만 입으면 누구나 꼴불견이 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배운 사람이든 못 배운 사람이든 예비군 군복만 입혀 놓으면 팔자걸음으로 뭉그적거리고 총기나 장비를 질질 끌고 다니면서 아무 데나 드러눕는 추태를 보였지요.

그처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저열한 언사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는 이야기 주제가 있다면 바로 정치가 그렇지 않은가 싶습니다. 지금은 선거철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목청을 돋울 일이 덜하지만, 지난 선거 즈음 한국 사회에 오갔던 말들은 참으로 낯 뜨겁고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손꼽히는 고학력 국가 대한민국에서 정치 이야기 만큼은 지성적이고 합리적인 토론 대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믿고 싶은 대로 믿는’ 현상이 두드러졌습니다. 정치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이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이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지 대화하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상대방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 숙고하고 진중하게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검증되지 않은 인터넷 매체나 편향적인 주장들에 이끌려 상대방을 무시하고 비아냥대며 공격하는 일이 잦았다는 데 많은 분이 동의하실 겁니다.

 

그리스도교적 정치관의 부재

더욱 실망스러운 것은 신앙인들마저도 각자 지지하는 진영의 논리를 반복하면서 품위 있는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또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49-53)고 말씀하실 때 ‘불과 분열’은 온갖 거짓을 불태워 정화하고 은폐된 악을 드러내는 쇄신의 계기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뜨거운 말다툼과 분열은 정화와 쇄신의 계기는커녕 공동체에 상처를 남기고 약화시키는 단초가 될 뿐이었습니다.

그런 현상의 한 가운데에는 자신이 속한다고 생각하는 진영 외에는 다른 의견이나 어떤 입장도 듣지 않겠다는 완고한 진영 논리가 있었습니다. 대화와 설득과 타협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공격과 방어, 승리와 패배의 흑백논리가 감염병처럼 창궐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치나 사회 문제를 두고 이야기를 시작하면 어느 편인지부터 따지는 편가르기 현상이 심해졌지요. 사회적 문제를 신앙의 눈으로 성찰하고 대화하려는 의지는 부족했고, 점잖은 입에서 가시 돋친 독설을 뿜어내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양심의 부재가 두드러졌습니다. 대체 저잣거리의 선동이나 말싸움과는 격이 다른 그리스도인 고유의 생각과 말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끼리끼리 주고받는 수군거림과 뒷담화가 그리스도인의 귀와 혀를 오염시키고, 복음의 정신에 비추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복음 말씀을 자기주장을 뒷받침하는데 끌어 쓰는 모습을 참 많이 본 것 같습니다.

 

두 진영의 충돌

이렇듯 세상을 아군과 적군으로 갈라놓는 진영 논리는 정치의 본질을 훼손합니다. 정치의 본질이 대화와 타협에 있고, 민주주의가 특권을 가진 소수에 의해서 다수가 휘둘리는 최악을 피하려는 차악의 선택이라면, 진영의 결집과 세 불림을 통해서 상대방을 제압하고 섬멸하겠다는 태도는 정치와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이 우리나라만의 현상도 아니고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긴 합니다. 진보냐 보수냐, 분배냐 성장이냐 같은 논쟁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도입한 곳이면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다만 오늘날 이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대두되는 것은, 무책임한 선전 선동이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거짓 뉴스와 정보가 판을 치고 ‘아니면 말고’식의 주장이 난무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오늘날 이편 아니면 저편으로, 곧 편파적인 비난이나 극찬으로 양분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주제에 대하여 견해를 표명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모든 형제들」, 156항)라고 지적하시면서 진영논리의 양극단에서 드러나는 문제점들을 짚으십니다.

 

대중 영합주의의 문제점

교황님께서 언급하시는 첫 번째 극단은 대중 영합주의(popular leadership) 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대중 영합주의를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선동적으로 힘없는 이들을 착취하는 것”(「모든 형제들」, 155항)으로 규정하십니다. 대중 영합주의는 세상이 억압하고 불의한 권력자(또는 기득권자)와 그들로부터 부당하게 착취당하는 선한 대중(또는 민중)이 두 편으로 갈라져 있다고 전제하고, 자신들은 권력과 기득권이 아니라 대중 혹은 민중의 편에 서 있다고 주장합니다. 세상이 근본적으로 절대 선과 절대 악의 투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신들은 선한 민중의 편이기 때문에 오류나 잘못에 빠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선한 민중의 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대중 영합주의자들은 현금을 살포하거나 선심성 정책들을 남발하고 대중을 상대로 하는 이미지 조작에 열중합니다. 그런 선심성 정책들이나 현금 살포가 장기적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는 따지지 않습니다. 동시에 자신들은 ‘대의’의 편에 서 있기 때문에 사적 이익을 위해 법과 제도를 회피하거나 악용하는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다지 큰 흠결이 아니라고 묻어 버립니다.

 

교황님은 이렇게 민중을 위한다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문제를 신랄한 언어로 지적하십니다.: “자신의 개인적 이득을 얻거나 권력을 유지하고자 개인이 어떤 이념적 구호 아래 민중 문화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때나 가장 비열하고 가장 이기적인 성향을 지닌 특정 집단 사람들에게 호소함으로써 인기를 얻으려고 할 때에 그러합니다. 이는 더욱 어설픈 형태든 더욱 정교한 형태든 관계없이 제도와 법률의 유린으로 이어질 때 더욱더 심각해집니다.”(「모든 형제들」, 159항)

 

이념의 민중과 실제의 민중

그리스도인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구체적인 현실 속에 살아가는 약한 이들의 삶이지, 이념이 내세우는 ‘민중’이 아닙니다.: “‘민중’은 논리적 범주도 아니며 신비적 범주도 아닙니다. 곧 그 민중의 모든 행위가 선하다거나 그들이 ‘천사와 같은’ 실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신화적 범주입니다.” 교황 회칙 「복음의 기쁨」과 「모든 형제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 구절은 대중 영합주의가 오용하고 있는 ‘민중’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라고 권고합니다. “폐쇄적인 대중 영합주의 집단은 ‘민중’이라는 표현을 왜곡합니다. 그들은 참된 민중에 대하여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160항)

인간의 현실은 결코 ‘착취하고 억압하는 악한 기득권자’와 ‘억압받는 선한 민중’의 두 범주로만 해소되지 않습니다. 흑백 논리로 정리되지도 않습니다. 민중의 현실이 오직 분배가 잘못된 탓이라고 외치는 것이나 이른바 기득권자를 끌어내리는 것으로만 개선될 수 없는 것은 인간 사회의 살아있는 현실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황님은 이념 싸움에 들러리 서는 허구의 ‘민중’ 대신에 구체적으로 살아있는 인간, ‘참된 민중’에 주목하자고 호소하십니다.

 

다음 호에서는 교황님께서 지적하시는 두 번째 극단, 그러니까 ‘권력자들의 경제적 이득에 일조하는 자유주의’의 문제점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이렇게 양극단의 문제를 짚어보면 교황님께서 말씀하시는 ‘힘없는 이들에 대한 관심’이 무엇을 뜻하는지 좀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