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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 대구대교구 사회복지사업의 초석을 다진 양 수산나 여사
하느님과 함께여서 행복하다


취재 김선자 수산나 기자

지난 8월 하양무학로교회 조원경 목사가 1960년대에 양 수산나(Younger Susannah Mary) 여사가 설립한 무학산 무학농장 근처 부지 200평을 교구에 기증해 교구에서는 그 뜻을 기리려 하고 있다. 이 소식을 들은 양 수산나 여사는 “하느님께 감사하고 한국에 감사하고 대구대교구에 감사하다.”며 “하양이 개발되기 전에 당시 하양본당의 이임춘(펠릭스) 신부님이 무학산 위 땅을 사서 그곳에 목장을 해 그 지역 농부들의 가계에 보탬이 되는 수입원을 마련하고 싶어서였다.”고 소회했다. 또한 “하양 농부들은 농장에서 일해 수입이 생겼으나 자녀들을 대구에 있는 중학교에 보내기에는 여전히 가난했고 신부님은 농부들이 하양에도 대구만큼 좋은 학교가 있어야 가난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고 생각하여 무학중학교를 시작했고 나중에 고등학교까지 설립해 명문학교로 키웠다.”면서 “하지만 애석하게도 언덕 위 농장은 실패했는데 내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수입하도록 도와 준 젖소들이 새로운 목장과 경쟁에 휘말렸고, 새 목장 사람들은 깡패들을 동원해 대구 가게들이 우리 우유를 못 사게 만들었다.”고 회상했다.

모든 것이 ‘하느님께 감사한 시간’이라고 밝힌 수산나 여사는 평신도 선교사로서 대구•경북지역 사회복지사업의 초석을 다지는데 크게 공헌했다. 1959년 제7대 대구대교구장 고(故) 서정길(요한) 대주교의 초청으로 대구땅을 밟은 양 수산나 여사는 세상의 끝까지 선교하겠다는 열망으로 전쟁의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난한 나라 한국땅에 왔다.

대구에 도착해 처음 효성여자대학교에서 영어와 불어를 가르치며 경북대학교에도 출강해 영어를 가르쳤던 양 수산나 여사는 “서정길 대주교님을 찾아 뵙고 작은 집을 하나 얻어 고아원에서 나와 거리를 헤매는 불쌍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와서 보살피며 그들에게 희망을 주며 살고 싶다.”고 간청을 드렸다. 그렇게 시작된 가톨릭여자기술학원(1962)이 현재 가톨릭푸름터의 전신으로 수산나 여사는 초대 원장을 지냈다.

성공회 가정에서 자란 그녀가 가톨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 도서관에서 우연히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성경을 펼쳐 읽으면서부터였다. 수산나 여사는 “마태오 복음을 시작으로 마르코, 루카, 요한복음까지 쉬지 않고 읽었는데 그 순간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나를 감쌌고, 대학 3학년 때 비로 소가톨릭에 입교했다.”고 고백했다.

 

양 수산나 여사는 옥스퍼드대학교를 졸업한 후 사회복지사의 자격을 얻기 위해 런던 경제학교(L.S.E.)에서 1년 동안 공부했다. 또한 1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선교에 관심있는 젊은이들과 매주 집에서 모임을 가졌던 그녀에게 프랑스에서 열리는 여름 캠프에 참석 할 기회가 주어졌다. 캠프에서 한국 유학생으로부터 ‘한국천주교회사’에 관한 내용의 특강을 들은 수산나 여사는 “한국 천주교는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평신도에 의해 시작된 놀라운 신앙으로 한국의 초기 교회사가 엄청난 빛의 폭발이었다.”며 “숱한 박해에도 하느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은 한국 순교성인들의 모습과 신자들 스스로 모여서 교리를 배우고 신앙을 키워가는 모습 등 특강을 듣는 내내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한국에 푹 빠졌다.”고 말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수산나 여사는 기도 중에 한국을 기억하게 됐고 자연스럽게 한국과 관련된 이들을 만나게 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은퇴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을 대상으로 영어회화를 지도하며 그 자녀들과는 성극을 준비해 공연을 하는 등 일상의 즐거움을 이웃과 나누며 살았던 양 수산나 여사는 현재 건강상의 이유로 교구에서 운영하는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다. 나이가 드니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고 기력도 쇠해지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수산나 여사는 “세상의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하느님 앞에서는 똑같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며 “우리는 모두 그런 사랑을 받았기에 그 사랑을 남을 위해 실천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라 한국으로 건너와 가장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의 편에서 봉사하며 순명의 삶을 산 양 수산나 여사는 I960년대 우리나라에 사회복지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시기에 가장 불쌍하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위해 살며 온전히 평등하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적 가치를 살리는 일에 투신하며 자신의 젊음과 열정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마지막으로 양 수산나 여사는 “돌이켜보면 이 모든 일이 하느님 사랑 안에서 모든 이와 함께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면서 “하느님과 함께여서 행복하다.”고 말하며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