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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타스 사람들
‘물따라 사랑따라 아래로’


글 이자경 글라라|들꽃마을 생활복지팀장

2013년 4월, ‘들꽃마을’이라는 시설에 입사 서류를 제출하고 면접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 나이 스물다섯, 마음의 준비를 하고 친구의 차를 얻어 타고 길을 나섰습니다. 대구에서 한 시간 남짓한 거리였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은 울퉁불퉁한 시골길에 주변은 온통 논과 밭이었고 휑한 길거리를 지나서 그곳에 도착할 무렵이 되자 참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마당에 주차하자마자 거주인으로 보이는 남녀 두 분이 차창에 코를 대며 안에서 사람이 내리길 기다리는 모습이 저에게는 매우 낯설고 처음 겪는 일 중 하나였습니다. 내리자마자 “오랜만이에요, 왜 왔어요?” 하시던 분과의 인연은 그날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면접을 보고 다시 길을 나설 때는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고, 잠깐 스쳤던 모습을 계속 되새기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러고 얼마 후 합격 소식을 듣고 5월 2일부터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자가용이 없으면 출퇴근을 할 수 없었기에 덜컥 새 차도 한 대 뽑아 맨땅에 헤딩하듯 난생처음 운전을 시작했습니다. 첫 출근, 새 차, 낯선 환경 속에서 시작된 첫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저는 생활 지도원으로 주야 교대근무를 하면서 한 층에 23~25명의 거주인을 혼자서 보살펴야 했습니다. 이름과 특성을 익히면서 하루빨리 적응하기 위해 노력을 했지만 쉽지는 않았습니다. 나이대가 비슷한 분부터 부모뻘, 그 이상 되시는 분들의 마음을 연다는 건 너무 어려웠습니다. 나만 적응하면 되는 줄 알았던 그때의 어린 생각과 모습이 요즘 입사하는 선생님과 거주인들을 보면서 다시금 떠오르곤 합니다.

근무하면서 선생님들과 다 같이 얼굴을 마주하며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한번, 인수인계할 때 뿐이었습니다. 온종일 혼자서 근무하다 한자리에 모이는 순간이 제게는 하루 중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각 층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다 보면 웃고, 찌푸리고, 때로는 화가 나기도 했지만 한가지는 분명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거주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애썼고, 조금씩 차이가 있을 뿐 언제나 그분들을 도와주려 했다는 것입니다.

입사한 그해 7월, 파주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들꽃마을에 입소하게 된 여성 거주인 한 분이 있었습니다. 현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입소하게 된 터라 도착해서도 표정이 어두웠습니다. 얼굴에는 긴장감과 경계심이 가득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데려다주러 온 언니 내외의 차를 보낼 때는 하염없이 목놓아 울던 분이셨습니다. 그런 분을 생활동으로 모시고 와 방으로 안내하기까지 저 또한 어떻게 하면 될지, 또 잘하고 있는 것인지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그날 밤 가방을 안고 잠들지 않으려하며 울었다가 한숨을 쉬었다가 하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습니다. 그분은 다음 날 아침 식사도 하지 않고 “나는 우리 집에 가겠다.”며 작은 체구에 큰 캐리어를 끌고 들꽃마을 진입로 경사길을 올랐습니다. 무조건 말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저는 “이제 여기에서 같이 사셔야 해요. 이러지 마세요.”라는 말을 반복하며 데려왔지만 그럴수록 더 강하게 부정하셨습니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던 중 저는 문득 그분의 마음이 되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현실이 얼마나 못마땅하실까.’ ‘이곳이 얼마나 낯설까.’ ‘가족들, 내 집이 얼마나 보고 싶고 그리울까.…’ 라고 말입니다. 입소하면 적응해서 사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 과정을 전혀 이해하지 않은 제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도 그분은 몇 달 동안이나 짐을 풀지 않고 수시로 캐리어를 끌고 집에 가겠다며 진입로를 올라갔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옆에서 함께해 드렸습니다. 경사가 가파르고 길이 합쳐지는 구간에 이르면 나를 한참 쳐다보다가 더는 가지 않고 그곳에 서서 “집에 가고 싶은데…. ” 하면서 목놓아 우셨습니다. 그럼 저는 더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어 실컷 울도록 그냥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진정이 되면 제가 캐리어를 받아 들고 내려오는 일을 수차례 반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모는 어디 살아요? ” 하며 저에게 먼저 말을 건네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천천히 서로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알아갔습니다.

제가 휴무를 보내고 오면 항상 기다렸다며 얘기해 주시고 본인이 마음속에 담아뒀던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은 시간이 지나도 그분과 적응하기 어렵고 담당 선생님 외에는 그분의 삶에 개입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할 때, 그래도 적응할 수 있도록 다 같이 도와달라는 말을 차마 꺼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많은 관심 때문에 오히려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 내가 생각을 잘 했어. ”라고 스스로 칭찬하곤 합니다. 적응까지 한참 걸렸다고 하지만 저는 사실 적응하는 방법이 조금 달랐을 뿐이라고 판단합니다. “한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열기까지 적응이 다 됐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덧 들꽃마을에서의 생활도 십 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데 그동안 너무 어렵게 느꼈던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확실히 말 할 수 있습니다. 나로 인해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느끼는 누군가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제 삶은 헛되지 않다는 것을 말입니다.

* 이번 호부터 새로 연재되는 카리타스 사람들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