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친교의 해를 위한 생태영성
관심


글 송영민 아우구스티노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제가 사는 남산동 신학교에는 겨울에 유난히 눈에 띄는 작은 나무들이 있습니다. 추운 겨울엔 나무들도 겨울잠을 자듯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아 있어 그 나무가 그 나무 같은데, 이 친구는 겨울이 짙어질수록 더 빛이 납니다. 붉게 물든 잎과 더불어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새빨간 열매가 얼마나 예쁜지 자꾸만 눈길이 갑니다. 관심을 가지게 되면 이름을 알고 싶어진다더니, 이 친구 이름이 궁금해졌습니다. 만물박사 정달용 신부님께 여쭈었더니 ‘남천(南天)’이라고 가르쳐 주시더군요. ‘남쪽 하늘’이라는 이름을 알고 나니 왠지 좀 더 가깝게 느껴져 사진도 찍어 보았습니다. 찬바람에도 의기양양하게 살며 우리 가까이에서 기쁨과 희망을 잊지 않게 해 주는 것 같아 괜스리 고마운 마음이 들더군요. 참, 남천의 꽃말은 ‘전화위복’이랍니다. 그 의미처럼, 이 겨울이 지나면 코로나19의 긴 터널이 끝나고 축복 가득한 날들이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남천’이라는 친구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어 인터넷 검색을 하다 보니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냥 몸짓이었지만 이름을 불러주니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시구절이 새삼스레 생각납니다. 사실 같은 꽃이지만 그 꽃의 이름을 알기 전과 후,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과 후는 그 느낌이 다릅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관심의 표현이기도 하지요. 여기서 관심(關心)이란 ‘관계할 관(關)’과 ‘마음 심(心)’, 즉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관심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떤 것에 마음이 끌려 주의를 기울이고 좀 더 자세히 바라보게 됩니다. 그렇게 관심을 가지고 보면, 달라 보입니다. 더 가까워 보이고, 더 제대로 보이고, 더 의미 있게 보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랑의 출발점도 관심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타자에 대한 관심은 점점 줄어드는 반면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문화가 뚜렷해지는 것 같습니다. 2021년 ‘나와 타인에 대한 관심 및 평판 관련 인식 조사’가 보여 주듯이, 현대인들은 무엇보다 ‘내’가 중요하고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또 많은 이들은 자신의 평판을 잘 관리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남들에게 보여지는 부분에 더 많은 투자를 한답니다. 물론 자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현상 자체가 문제는 아니겠지요.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두기 마련이고,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마음 역시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내 것과 나를 향한 관심에 열중하는 만큼 타자에게 제대로 된 관심을 주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우리네 관심이 자기 중심적이고 표면적인 것에만 치우치다 보니 우리 사회에 ‘무관심’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태영성은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닫힌 관심’에서 벗어나 타자와 이 세계를 향한 ‘열린 관심’에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내가 평안하는 데만 만족하지 않고,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 우리 공동체도 안녕한지 살필 수 있는 내적 여유를 가져보자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관심의 폭을 ‘나’에서 ‘우리’로 넓힐 수 있을 때 친교의 해도 좀 더 풍성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회칙 「찬미받으소서」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진심 어리고 애틋한 관심”(19항)이 있을 때 부서진 세상이 치유되고 하느님의 창조 질서도 회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무관심의 세계화’를 넘어 ‘관심의 세계화’로 나아갈 때입니다. 〈빛〉 잡지 독자 여러분, 관심 어린 눈길로 이름을 불러주면 좀 더 알게 됩니다. 알면 좀 더 사랑하고 지켜주게 될 것입니다. 주위를 둘러봅시다. 지금 여러분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이는 누구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