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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교의 해를 위한 생태영성


글 송영민 아우구스티노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춘서(春序)’라는 말이 있습니다. 봄꽃이 피는 순서를 일컫는다고 하지요. 이 말처럼 꽃들은 마치 자신이 필 때를 아는 듯이 순서에 맞춰 모습을 드러냅니다. 춘서의 가장 앞에 놓인 매화가 꽃샘추위에도 꿋꿋하게 봄 향기를 지키고 있으면, 어느새 산수유나무가 노란 기침을 해대며 정말 봄이 오고 있다고 속삭입니다. 이에 질세라 목련도 단아하고 우아한 자태를 자랑합니다. 그 다음에는 개나리가 거리 곳곳에 노랑 명함을 돌리고, 진달래는 봄산을 붉게 물들입니다. 다음으로 찾아오는 벚꽃은 봄바람 휘날리며 완연한 봄기운을 전해 주고, 마침내 자기 차례가 된 철쭉은 봄의 절정을 마음껏 노래합니다.

이처럼 봄꽃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일정한 간격을 두고 차례대로 피어나며 우리에게 봄이 오는 순서를 알려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이러한 춘서가 헝클어지고 있습니다. 꽃 피는 순서가 들쭉날쭉하더니 동시다발적으로 피는 경우도 생기며, 전국적으로 개화 시기가 점차 앞당겨지고 있습니다. 이 꽃이 피고 지면 저 꽃이 피고 지면서 조금씩 다가오던 봄이었는데 이제는 목련과 개나리, 그리고 벚꽃이 동시에 피어 있는 모습이 낯설지 않습니다.

올해는 벚꽃이 너무 빨리 만개해 버리는 바람에 지자체들이 준비한 축제가 ‘벚꽃 엔딩’이 되어 버렸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벚꽃 피는 때가 학생들의 중간고사 시기(4월 중순)와 겹친다는 뜻에서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는 농담도 있지만 이제는 옛말이 되어 버렸지요. 이러다가 벚꽃의 꽃말이 ‘입학식’이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꽃이 빨리 피면 그만큼 봄이 빨리 와서 좋은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다양하고 많은 꽃이 일찍 한꺼번에 피니 당장은 보기 좋은 것도 사실이지요. 하지만 봄꽃이 일찍 피었다가 져버리면 그 꽃에 의존해 살아가는 곤충의 활동 시기와 어긋나 곤충이 살기 어려워집니다. 예를 들어 야생벌들이 겨울잠에서 깨어났는데 꽃이 지고 있다면, 그들은 먹이가 부족한 상황에 부딪히고 이는 개체수 감소로 이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야생벌에 의해 수분이 되는 식물도 큰 영향을 받기 마련이고, 이로 인해 생태계 전반에 교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커집니다. 이른바 ‘생태 엇박자’가 발생하는 것인데, 이 가운데 인간의 삶도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봄꽃 개화 시기는 왜 점점 빨라지고 있을까요? 기상청 자료에 따르면 지구온난화로 인한 봄철 온도 상승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합니다. 엇박자 난 개화 시기는 결국 기후 변화의 가속화를 보여주는 증상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전문가들은 단순히 ‘꽃이 빨리 폈다’에서 그치면 안되고, 그 현상 뒤에 숨은 경고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기후 변화로 수많은 세월 동안 지켜졌던 절기가 무너지고 있는 가운데 더 이상 일찍 피는 꽃을 반길 수만은 없는 현실이 씁쓸하지만 우리가 당면한 문제에 정직하게 직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보기 힘든 것에 눈 감지 않고 제대로 보아야 생태 이야기가 ‘낭만주의’에 빠지지 않겠지요. 그래서 생태영성도 이 세계의 밝은 부분뿐만 아니라 어두운 면도 함께 보자고 초대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꽃도 필 때가 있고 지는 때가 있습니다. 자연은 그렇게 순리를 따라 일정한 질서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 ‘때’는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자연에 새겨 주신 ‘문법(grammar)’이고 인간은 그것을 존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회칙 「찬미받으소서」도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며 그 안에 인간이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 질서와 역동성을 새겨 주셨다는 인식”(221항)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힘이 아무리 커지더라도 자연의 질서를 함부로 어지럽힐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자연의 때를 변화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속도에 발맞춰 살아야 하는 존재 입니다.

지난 3월 이미 활짝 핀 벚꽃을 사진에 담으며 벚나무에게 자꾸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기후변화에 적잖이 놀란 얼굴로 한참이나 일찍 피어 버린 벚꽃, 때와 상관없이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저는 마냥 그 모습을 즐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때 이른’ 벚꽃 구경을 한 다음 날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가 제6차 평가보고서를 최종 승인했다는 소식이 들리더군요. 이 보고서에 따르면 지속가능한 미래를 확보하기 위해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이 빠르게 줄고 있으며 앞으로 10년 동안 우리의 행동이 지구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앞으로의 10년은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골든 타임’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때입니다. 지금은 팔짱을 끼고 있을 때가 아니라 뭐라도 해 봐야 하는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