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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動) 하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글 김관호 리카르도 신부|영천성당 보좌

몇 해 전에 세차를 맡겼었다. 차에 있던 많은 인형을 보고 세차장 사장님이 “혹시 애 아빠이십니까?”라고 묻길래 웃으며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 적이 있다. 그 이후로도 종종 애 아빠, 학부형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아간다.

얼마 전 주일학교 저학년 아이들을 데리고 소풍을 다녀오면서 아이들이 내가 결혼을 했고, 두 살짜리 아이의 아빠일 것이라고 했다. 내 나이가 되면 어련히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을 것이라는 아이들의 순수한 논리에 한참을 웃었다.

‘아버지’라는 이름이 나를 지칭할 이름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종종 신자 분들의 극진한 대접의 명분으로 ‘신부님은 본당의 아버지’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종종 있다. 아들뻘의 신부를 어른, 아버지라고 이야기하시는 신자 분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들며 아버지라는 이 이름을 견뎌내기에 부끄러울 뿐이다.

가부장의 문화가 여전히 살아있는 곳에서 아버지라는 이름은 때로는 폭력적으로 다가오곤 한다. 상호 존중과 배려가 아니라 일방적인 존중과 배려에 대한 암묵적인 요구가 아버지라는 이름 속에 깊숙이 박혀 있어 나에게는 부당하고 부담스러운 이름이다.

아버지가 되기 위해 묵묵히 살아가며 임신한 아내를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는 동기 형을 만났다. 아이의 이름을 짓고 아이와 아내를 위해 공부하고 있는 형의 모습은 아버지라고 불리는 내 모습을 초라하게 만들어 버렸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무엇인가를 요구하려고 내 의견을 일방적으로 존중받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요구를 들어주고 존중해 주기 위해 만들어진 이름이 아버지라는 것을 예비 아빠의 모습을 통해 되새길 수 있었다. 존중과 대접이 아니라 누군가를 향한 책임감의 무게가 바로 아버지의 이름이다.

존중을 요구하는 시대다. 누군가를 위한 책임감이 사라져 버린 시대 안에서 아버지는 고귀한 이름이자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름이리라. 생명을 탄생시키는 존재로서의 아버지가 아니라 지켜주고 아껴줄 수 있는 존재로서의 아버지의 부재가 신부(神父)라는 정체성으로 공백을 메꾸어 주지 못하는 것 같아, 우리를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신자 분들의 마음이 참 부담스럽다.

세상의 많은 아버지들의 삶이 대접과 존중으로부터 부디 폄하되지 않길 바란다. 이 아버지의 삶이 책임과 존중을 실천함을 통해 더욱더 가치있는 일이 되어 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