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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교의 해를 위한 생태영성
돌봄


글 송영민 아우구스티노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학교에는 1학년 학생들만 함께 모여 사는 영성관이 있습니다. 신학생으로서 첫걸음을 내딛고 ‘영성의 해’를 살아가는 공간이지요. 이곳에는 올해부터 자칭 ‘어린 왕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답니다. 담임 신부님이 식물 키우기 숙제를 내준 모양인데, 몇몇 학생들이 마치 생텍쥐페리의 ‘장미를 돌보는 어린 왕자’가 된 듯 정성껏 식물을 보살피더군요. 자세히 보니 화분마다 이름표가 달려 있는데, 거기에 적힌 이름은 두 개였습니다. 하나는 식물의 이름, 다른 하나는 그 식물을 돌보는 사람의 이름, 아! 그래서 학생들이 자기가 맡은 식물을 그렇게 애지중지했나 봅니다.

자신과 짝이 된 식물에게 매번 물을 주고 햇볕에 내어놓는 신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새삼스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를 돌보고 보살필 때 사람은 따뜻하게 빛나는구나.’ 물론 타자를 돌보는 행위가 인간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많은 동물 역시 자식을 사랑하고 희생할 줄 알지요. 예를 들어 영장류 사회에서는 장애가 있는 새끼를 어미와 동료가 정성껏 돌보는 사례가 종종 목격되기도 합니다. 황제 펭귄이 남극의 얼음 위에 서서 강추위와 눈 폭풍을 온몸으로 받으며 헌신적으로 새끼를 양육하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런데 다른 생물종의 사랑과 보살핌이 아무리 대단해도 자기 집단을 넘어서지는 못합니다. 이 점이 인간의 돌봄과 근본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네 인간은 내 가족인지 아닌지, 나와 같은 종인지 아닌지, 내가 사는 지역의 문제인지 아닌지를 넘어 돌봄을 펼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일면식도 없지만 홀로 사는 노인을 찾아가 필요한 도움을 주고, 국경을 초월해서 의료 봉사 활동을 하고, 위험에 처한 야생동물을 구조하고, 멸종 위기종 보호를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바로 인간입니다. 이처럼 우리네 인간의 돌봄은 세상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비록 오늘날 우리 사회에 ‘무관심과 버림의 문화’가 만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내면에는 돌봄을 좋아하고 잘 보살필 수 있는 능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그렇게 돌봄에 대한 깊은 동경을 심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창조 세계를 사람의 손에 맡기시며 “일구고 돌보게”(창세 2,15) 하셨습니다.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끊임없이 보살피시는 분께서 우리 인간을 돌봄의 협력자로 부르신 것이지요. 이처럼 하느님은 우리의 손을 통해 이 세상을 돌보신다는 점에서 인간은 창조 세계에 대한 하느님의 보살핌을 반영하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생태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창조주로부터 선물 받은 돌봄의 에너지를 키워 나가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찬미받으소서」 회칙에서 “돌봄의 문화가 온 세상에 스며들도록”(231항) 노력하자고 우리를 초대하시는데 “서로를 돌보는 작은 몸짓으로”(231항) 이 초대에 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마다 자기 권리만을 주장하기에 바쁜 이 시대에 너의 안녕을 헤아릴 줄 알고 누군가의 목마름을 채워줄 수 있는 내적 여유를 가져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타자를 돌보려는 내 손길을 통해 이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보살핌도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돌봄의 문화를 이루어가기 위해 꼭 무슨 많은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는 것보다 ‘정성’을 다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진정한 돌봄은 열심히 해서 많은 성과를 내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존재를 진심으로 대하는 그 태도에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자기 이름표가 붙은 꽃 화분에 정성껏 물을 주던 한 신학생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며 깨닫습니다. 생태영성은 작은 생명 하나를 소중히 여기고 정성을 다해 돌보는 자리에서 싹튼다는 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