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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교의 해를 위한 생태영성
놔둠


글 송영민 아우구스티노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어릴 때 처음 본 서해 갯벌은 다소 실망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동해의 푸른 파도에 익숙해 있던 저에게 물이 빠져버린 회색빛 진흙땅은 지저분하게 보일 뿐 매력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다시 마주한 갯벌은 예전과는 다르게 보이더군요. 갯벌의 가치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밀물일 때는 바다가 되고 썰물일 때에는 육지가 되는 이곳은 산소와 유기물이 풍부합니다. 그래서 온갖 생명체가 꿈틀대며 살고 있고, 철새들이 휴식과 번식을 위해 머무는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갯벌은 ‘거름종이’처럼 육지에서 흘러들어 온 오염 물질을 걸러내는 역할을 하고 ‘스펀지’처럼 많은 양의 물을 흡수해 홍수 조절 기능도 합니다. 최근엔 갯벌의 탄소 흡수 능력이 입증되어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중요한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지요.

얼마 전에 황윤 감독의 영화 ‘수라’를 보면서 갯벌의 다양한 역할을 넘어 그 아름다움까지 헤아려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새만금 지역에 마지막으로 남은 갯벌 ‘수라’의 모습을 7년간 기록한 다큐멘터리입니다. 저의 예상과 달리 이 영화는 갯벌 생태계 보전의 당위성을 앞세우기보다 갯벌의 생물과 인간이 공존하고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데 집중합니다. 30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 새만금 간척사업에도 불구하고 아직 살아있는 갯벌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너무나 아름다워 슬프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흰발농게의 재빠른 움직임, 검은머리갈매기의 우아한 날갯짓, 도요새의 황홀한 군무, 쇠검은머리쑥새의 아련한 노래, 칠면초 군락지의 붉은 물결까지 ‘모든 생명은 아름답다’더니 정말 그렇습니다. 그래서 부디 그들이 잘 살아내기를 응원하게 됩니다.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새만금에 살아있는 갯벌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새만금 마지막 물막이 공사가 끝난 후 조금씩 잊혀져 가던 이곳에서 시민 생태조사단이 활동한다는 소식을 어렴풋이 들었지만 부질없는 일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동안 죽은 줄만 알았던 갯벌에 아름다운 존재들이 여전히 굳세게 버티고 있음을 기록하고 증명합니다. 그렇습니다. 그토록 많은 생물과 사람들이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수라 갯벌에서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이를 외면한 채 생명의 보고인 수라 갯벌에 새만금 신공항을 건설하겠다고 합니다. 바로 옆에 만성 적자에 허덕이는 군산 공항이 이미 운영 중인데도 말이지요. 과연 누구를 위한 공항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아름다운 것들’이라는 노래와 함께 올라가는 자막에는 수라 갯벌 주민들과 공동 출연한 생물들의 이름이 가득 적혀 있었습니다. 그 이름들을 보고 있으니 새삼스레 그들을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질문해 보았습니다. 아름다운 것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영화 ‘수라’를 통해 제가 얻은 답은 ‘놔둠’입니다. 해수의 유통을 막지 않고 놔둔 결과 새만금 수질이 개선되고 갯벌이 다시 살아나듯이, 인간의 자발적 자기 제한은 자연이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그래서 자꾸 우리 힘으로 무엇을 이루려고 하기보다는 자연이 주도권을 쥘 수 있게 놔둘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처럼 ‘할 수 있음’에서 ‘놔둠’으로 우리네 태도와 삶의 방식이 전환 될 때 생명의 아름다움은 지켜질 수 있겠지요.

창세기에 따르면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후 몸소 뒷전으로 물러나 안식을 취하면서 만물을 그대로 놔두십니다. 하실 수 있다고 다 채우기보다 여백을 남겨 두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여유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불가피한 개발, 물론 필요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지구의 상황은 어쩌면 그대로 놔둬서는 안 될 수준일 수 있고, 복원을 위한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한 시점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일단 그대로 놔두는 연습이 더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서두르지 않고 자연의 느린 속도에 익숙해질 때 우리의 행동이 지구 공동체 전체의 안녕을 위한 것인지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물길이 차오르는 ‘수라’를 희망하며, 갯벌을 매립하고 공항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에게 정중히 묻고 싶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그냥 놔둘 수는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