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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에서 온 편지
괜찮아요, 천천히 하세요!(沒關係, 慢慢來! : 메이꽌시, 만만라이!)


글 강우중 베르나르도 신부|타이중교구 선교사목

대만에 온 지 5년 정도 되니 몸과 마음이 처음 온 그날과 많이 달라진 것을 느낍니다. 초심을 잃었다고 할까요? 그래서 요즘 꾸준히 달리는 습관을 들이고 있습니다. 달리기를 하는 이유는 짧은 시간 안에 내 몸과 마음 사이의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고 그것을 어떻게 조절해야 할지 판단하고 실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마음이 원하는 거리는 10km이지만 현실은 3km도 겨우 달리는 몸으로 하루 빨리 목표에 도달하고자 욕심을 부리면 오히려 몸과 마음에 더 해로울 뿐이지요. 이럴 때 이곳 사람들은 “괜찮아, 천천히 하자!”(沒關係, 慢慢來! : 메이꽌시, 만만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천천히, 꾸준히 목표를 향해 가다 보면 어느새 그곳에 도착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 조급해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도 이러한 마음으로 달리다 보니 한두 달 후 원하는 바에 이르렀고, 무엇보다 천천히 목표에 이르는 과정 안에서 앞으로의 삶에 대한 영감을 얻고 있습니다.

이렇게 글을 여는 이유는 타이중에서의 사목활동이 마치 달리기와 같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이미 저 멀리 목표하는 바에 닿았지만 현실은 아직 목표에 도달할 만큼 역량이 충분하지 못한 상황이지요. 제가 우리 본당에 바라는 것은 교우들 모두가 신앙인으로서 살아온 삶을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우들 스스로 왜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지 생각하면서 그저 전통이라는 명목으로 혹은 개인적인 이익을 바라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 저의 사목목표입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우리 본당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칭수이 천주당은 이미 70년의 세월을 살아왔기에 그 시간을 통해 우리가 말해야 할 신앙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목표와 본당의 현실과의 거리는 멀었습니다. 이유는 70년이라는 세월 동안 서너 쪽 분량의 간단한 본당 소개 외에는 확보된 자료가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목표하는 바와 다르게 주어진 현실은 보좌신부로 이곳에서 살 때 겪은 일이 잘 말해줍니다. 마침 타이중교구에서 각 본당의 역사를 정리해서 제출하라는 요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료라고는 앞서 말한 간단한 본당 소개 외에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본당이 설립된 시기에 필요한 자료라면 적어도 당시의 사진과 설계도 정도는 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료들을 정리해 두면 오랫동안 성당을 나오지 않는 교우들이 마음을 새로이 하여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본당 신부님에게 본당 역사와 관련된 자료들이 있는지 물었지만 자료가 없다는 대답뿐이었습니다. 그때의 기분은 마치 달려가야 할 길은 먼데 아직 출발도 못하고 있는 것처럼 답답했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저는 한걸음이라도 내딛고자 마음속으로 ‘沒關係, 慢慢來!(메이꽌시, 만만라이!)’를 외쳐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저는 보물찾기를 하는 아이처럼 본당을 구석구석 뒤져서 역사를 알 수 있을 만한 자료들을 모았습니다. 그리하여 현재는 이사용 상자 하나 분량의 옛날 사진들을 확보한 상태입니다. 게다가 전임 본당 신부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방을 정리하면서 본당의 초기 자료인 건물 설계도와 과거 손으로 기록된 본당의 교우 현황 및 혼인 문서 등을 발견했습니다. 비록 보관 상태가 좋지 않아 빛이 바랜 것들이 몇몇 있었지만 그래도 찾아냈을 때의 기분은 마치 보물찾기에 성공한 아이마냥 될 듯이 기뻤습니다. 비록 거쳐야 할 과정은 아직 많지만 조금씩 추진해 가는 과정 속에서 얻게 되는 자그마한 결과가 저에게 앞으로 가야 할 길에 활력소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최근 저는 그동안 모아둔 옛날 사진의 일부를 복사하여 교우들이 보고 작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본당 게시판에 붙여 두었습니다. 그리고 사진에 찍힌 당시 상황과 함께했던 사람들의 구체적인 이야기와 소감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사진을 보는 방식 또한 덧붙여 두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최종 목표는 본당 역사를 담은 책자를 출간하고, 본당 설립 이래 한 번도 독자적으로 진행한 적이 없는 본당의 날 행사를 추진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걸릴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과정이 앞으로 신자들에게 신앙생활의 활력소가 되기를 바라며 “괜찮아요, 천천히 하세요!”(沒關係, 慢慢來! : 메이꽌시, 만만라이 !)를 다시 한번 되뇌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