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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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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월간 〈빛〉 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비가 많이 와서 산이 무너지고 집이 부서졌다. 길은 사라지고 논밭은 묻혀 버렸다. 사람도 다치고 죽었고 그만큼 아픔과 슬픔이 더해갔다. 올여름 만의 일이 아니다. ‘기후 위기’가 일상이 되어가는 시간을 우리는 걱정스럽게 살아내고 있고 살아내야 한다.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세우려는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함께 고민하지만 때론 버티며 쉽게 제 목소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기후 위기에 대한 목소리도 그렇다. 교회는 진즉 플라스틱과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며 지구의 생태를 위해 노력하는 일에 매진해 왔다. 소소한 노력일지라도 아파서 무너지는 지구의 생태를 걱정하는 진지한 고민을 행동으로 나누고 그것이 복음이 말하는 속 깊은 이야기의 한 단면이라 여긴다.

다만 신앙인이 기억해야 할 일은 ‘아픔의 차등(差等)’에 관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지간히 아프고 힘든 일은 견뎌낸다. 그러나 견뎌 내는 일에는 차등이 있다. 산이 무너져 피해를 입은 이들, 물이 넘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이들 대부분은 외진 곳, 가난을 분신처럼 짊어진 이들이었다. 그들에게 기후 위기의 걱정은 먼 산,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라 삶 자체의 걱정이었고 그들의 아픔은 씻고 지나갈 단순 사고나 불운이 아니라 살속 깊이 새겨져 지울 수 없는 문신이 되었다. 기후 위기를 실존적 위기라 자주 부른다. 다만 실존을 위한 사회적 조건은 천지차이라는 사실을 매번 경험하는 우리에게 신앙은 그 경험의 절망이나 좌절을 희망과 기쁨으로 바꾸어야 할 사명을 부여한다.

탄소 중립, 생태 복원 등의 구호가 하루하루 살아남기 힘든 이들에겐 또다른 억압이나 통제로 작동하는 것은 아닌가 되돌아 볼 일이다. 플라스틱 빨대를 사용하기 보다 종이 빨대를 사용하는 게 당연하지만 시장통 한구석에서 나물을 파는 등이 굽은 할머니들이 사용하는 비닐봉지를 보고 비난할 수만은 없다. 텀블러 사용이 상식이고 교양미를 갖춘 바람직한 일이겠으나 값싼 노동 시장에서 막일하는 이들이 들고 있는 종이컵을 두고 개념없다고만 할 수 없다. 그렇게 밖에 살아가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 탄소 중립, 생태 복원의 구호가 단죄의 잣대가 되고 죄책감을 유발하는 무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는 세상을 계몽하려는 비장하거나 무모한 통치자가 아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통치하셨던 게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셨다. 예수님이 살아간 세상은 묵시주의가 만연했었고 악하고 무모하며 더러운 것이 세상이라 여겼다. 그 시대 그 사람들이 제 세상을 그렇게 여겼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다. 인간의 욕망으로 일그러진 지금의 기후를 인간 탓, 세상 탓으로 돌리기 전에 우린 과연 세상을 사랑하고 있는가에 대해 물어야 한다. 서로를 사랑하지 않고 서로를 경쟁의 대상으로 여기며 제 이름을 드높이는 또다른 ‘바벨탑’을 세우기에 급급한 상태로 오늘의 기후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단순히 〈빛〉 잡지를 읽기만 했는데 이젠 교정하고 만들어 내는 일에 함께하게 됐다. 잡지를 기획하고 모여진 글을 고치고 다듬는 일은 실은 ‘읽는 일’이다. 첫 독자로서 빛을 바라보며 사변적 논리나 사상을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일상 속 행여나 놓치고 살았던 아픔을 보듬고 다양한 세상의 ‘차등적 아픔’을 들춰보고 서로를 향한 사랑이 일그러진 세상을 제대로 세울 수 있는 길임을 발견하고자 한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세상 모든 피조물을 향한 복음 선포의 시작임을 ‘빛’을 통해 만들어 갔으면 한다. ‘빛’은 원래 그런 것이니까…

 

* 그동안 여는 글를 연재해 주신 편집주간 최성준(이냐시오) 신부님이 지난 718일자로 가톨릭신문사 사장으로 발령 받았습니다. 이번 호부터 새 편집주간 박병규(요한보스코) 신부님이 연재해 주시겠습니다. 그간 좋은 글을 써 주신 최성준 신부님께 감사드리며 새로 오신 박병규 신부님의 연재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