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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교의 해와 사회교리
외로움의 시대와 친교의 공동체(1)


글 박용욱 미카엘 신부|교구 사목연구소장

 

인간은 처음부터 외로운 것이 아니다

경희대 김만권 교수의 논문 「한나 아렌트와 외로움, 그리고 ‘대화형’ 인공지능」(2022)은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사유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겪는 외로움의 문제를 성찰합니다. 논문에 따르면 ‘외롭다’(Lonely)라는 말은 적어도 영어문화권에서 16세기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 이전에는 없던 표현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 당시만 해도 유럽 사람들은 홀로 있음을 표현하는 ‘홀로됨’(oneliness)을 부정적으로 보기보다 하느님을 더 가깝게 여기고 마주하는 기회로 여겼다고 합니다. 셰익스피어가 묘사하는 ‘외로움’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주변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고 고립된 상태를 뜻하는데, 이런 부정적인 의미의 외로움은 17세기까지도 그다지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자아, 타인, 세상의 상실

그런데 18세기부터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유럽에서 외로움이 본격적으로 확산된 계기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산업 혁명에서 비롯된 산업화와 이에 따른 도시화라고 주장합니다. 18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유럽의 인구가 약 2.5배 이상 불어나자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늘어난 인구만큼 일자리가 증가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잃고 불필요한 존재로 전락했으며 대규모 실업 위기 속에서 인간의 가치는 바닥을 칩니다. ‘당신이 아니어도 이 돈을 받고 일할 사람 많으니 잔말 말고 일하든지 아니면 나가든지!’ 식의 윽박지름은 오늘날에도 낯선 것이 아니지요.

하여간 한나 아렌트는 이 ‘뿌리뽑힘’(uprootedness)과 ‘쓸모없음’(superfluousness)의 경험이 유럽에서 있었던 온전히 새로운 현상이라 강조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고 보장해 주는 장소가 없는 상태, 그리하여 세상에 속할 곳이 없어진 상태는 먼저 자신의 삶 자체를 회의하게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립니다. 자아를 잃어버린 사람이 다른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여유가 있을 리 없고, 그렇게 사회적 관계를 상실한 사람에게 세상은 의미 있는 곳일 수가 없지요.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되었을까, 내 삶은 왜 이리 외롭고 고통스러울까’ 하며 고민하던 사람들은 자기혐오의 화살을 견디다 못해 더 나쁜 선택을 합니다. 자기혐오에서 타인에 대한 혐오로 옮겨 가는 것이지요. 오늘날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혐오 현상, 그러니까 빌미만 잡았다 싶으면 마구 분노와 증오를 쏟아 붓는 현상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인간의 또다른 얼굴일 수 있습니다.

 

사회적 문제인 외로움에 대처하는 해외 사례

이렇게 외로움이 그저 한 사람의 내면의 문제가 아니라 커다란 사회 변동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해결책 또한 혼자 마음을 다스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함께 고민하고 공동의 해결책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눈에 띄는 것이 지난 2018년 ‘외로움부 장관’(Minister for loneliness)를 임명해 국가적 차원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영국의 사례입니다.

외로움부를 신설한 계기가 되었던 2017년 ‘조 콕스 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 인구의 약 14%에 달하는 9백 만 명이 외로움을 경험한 것으로 추정되며, 17~25세 청년층 43%, 장애인 50%, 아이를 기르는 부모 가운데 절반 이상이 고립감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 가운데 38%는 불면증에 시달린 경험이 있고, 3분의 1가량은 참기 힘든 외로움을 느낀 적이 있다고 응답합니다. 마음이 괴로우면 몸도 힘들어집니다. 외로움을 겪을수록 사망 위험과 심혈관 질환, 우울감, 인지 능력 저하, 치매 등을 겪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외로움은 하루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과 같이 몸에 해롭다고 합니다. 외로움 때문에 초래되는 사회적 비용만 해도 한 해 약 50조 원에 이른다고 하지요.

 

이렇게 심각한 사회적 문제인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먼저 세 단계의 계획을 실행합니다. 첫째, 사회적 고립과 외로움에 대한 객관적인 실태 조사와 척도 구축. 둘째, 펀드 조성. 셋째, 범정부적 민관 합동의 대응 전략 수립의 과정을 거쳐 종합대책을 수립했습니다. 이 대책의 골자는 개개인 사이의 사회관계망을 강화하고, 특히 생애주기에 따라 고립되어 외로워하는 취약계층을 포용하고 지지할 수 있는 지역사회를 건설하는데 있습니다. 공공과 민간을 가릴 것 없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줄 수 있는 수단들을 동원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이지요. 영국의 이런 움직임과 흡사하게 유럽 연합과 미국에서도 여러 가지 대책을 세우며 해결책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외로움

우리나라도 외로움 문제에 대해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2018년 4월 한국리서치가 외로움에 대한 여론 조사를 한 결과, 한국 사회의 외로움 문제도 심각하다는 결과를 얻습니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우리나라의 경우 20~30대가 가장 외로운 세대이고, 1인 가구일수록 외로움을 느끼며, 일정 소득 이하(가구 소득 200만 원 미만)일 경우 더 외롭다는 것입니다. 2017년 OECD의 ‘더 나은 삶 지수’(Better Life Index ) 조사에서 우리나라는 ‘곤란한 상황에서 도움을 청할 가족이나 친구가 있는가?’ 라는 질문에 OECD 41개국 가운데 눈에 띄는 꼴찌를 차지한 것도 유심히 볼 만합니다.

그래서 우리 정부와 지자체에서도 1인 가구 고독사 방지 사업, 홀몸어르신 살피미 서비스, AI 생활관리 서비스, 반려 동물 추천 및 돌봄 서비스와 같은 다양한 사업을 벌입니다. 또한 우리 교구도 사회복지회를 통해 한몫하고 있지요. 하지만 이런 사업들이 과연 외로움의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있는지는 따져 볼 일입니다. 여러 사업과 활동에 앞서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바로잡는 일이 함께 따르지 않으면 사업은 사업으로 그칠 가능성이 큽니다.

더구나 지금 우리나라에서 시행되는 많은 대책은 어르신들을 돌보기에도 급급해 다양한 계층과 성별, 세대를 아우르기에는 벅찬 감이 없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청년들의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기댈 곳 없이 스스로 미래를 개척해야 하는 많은 20~30대 청년들이 겪을 외로움의 깊이는 얼마나 두려운 것일까요? 대구 서구만 해도 1인 가구의 비중이 46%를 차지하고, 그중에서 중장년이 46%입니다. 나름의 사정으로 가족과 가정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많은 이들은 어디서 그 외로움을 달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뿌리뽑힘’과 ‘쓸모없음’의 어려움을 덜어 낼 수 있을까요?

 

교회의 자리

그런 면에서 작년 11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바티칸 커뮤니케이션 부서 총회 참석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교황님은 이날 연설에서 교회의 임무가 ‘마지막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는 세상의 ‘실존적 주변부’라고 강조하십니다. 여기서 실존적 주변부란 인간이 ‘경제적 이유로 사회 변두리에 놓여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빵은 풍부하지만 의미가 없는 곳, 가족의 실패, 또는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 개인적인 사건이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소회된 상황에서 살아가는 곳’을 말합니다. 세상이 삭막하고 각박하여 외롭기 그지 없을 때 삼위일체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친교의 삶으로 초대된 교회가 그 외로움을 달랠 곳이 되고 있는지 살펴보라는 말씀 같습니다.

 

올 9월은 한가위 명절이 있는 달입니다. 어쩌면 외로운 이들을 더 외롭게 하는 날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먼저 명절을 홀로 맞아야 하는 이들을 생각하고 마음과 노력을 기울여 봅시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해결해야 할 외로움의 문제를 두고,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봅시다. 다음 달에는 외로운 시대에 친교를 증언해야 할 우리가 어디서부터, 또 어떻게 ‘실존적 주변부’를 포용할 수 있을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