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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교의 해를 위한 생태영성
배려


글 송영민 아우구스티노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유럽의 거리를 걷다 보면 창가에 놓인 꽃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엔 유명한 관광지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변두리 동네에 가도 비슷한 모습이 눈에 띕니다. 창문틀에 꽃병이나 화분을 소박하게 놓아둔 집이 있는가 하면, 창문 아래쪽에 화려한 꽃들이 가득한 선반을 달아 둔 곳도 있습니다. 발코니 난간에 걸려 있는 예쁜 꽃 화분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지요. 건물 외벽이나 가로등에 매달아 둔 공중걸이 화분에 알록달록 피어있는 꽃들도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이처럼 꽃 장식으로 화사한 유럽의 집들과 거리를 보고 있으면,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사실 창가에서 키우는 꽃은 창문 안의 ‘내’가 즐기기 위해서라기보다 창문 밖의 ‘남’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만 생각한다면 예쁜 꽃을 굳이 집밖에 두고 가꾸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런데도 꽃을 창가에 내어놓는 사람은 지나가는 이들과 그 꽃의 아름다움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작은 배려를 통해 집주인과 행인의 구분 없이 함께 긍정적인 에너지를 공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배려는 어떤 규정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마음의 여유에서 자연스레 생겨납니다. 아름다운 꽃을 창밖에 두고 정성스럽게 가꾸는 문화는 그렇게 하라는 법이 있어서가 아니라 행인들이 그 꽃을 보며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들을 통해 조금씩 형성된 것입니다. 늘 자기 것만 우선시하며 바쁘게 살아가는 이들의 동네에 과연 꽃 화분을 창문가에 내놓는 배려의 문화가 자리잡을 수 있을까요? 이런 점에서 남을 배려할 줄 안다는 것은 그만큼 ‘나를 넘어 너를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전 우리나라의 많은 지자체에서 ‘출입문 잡아주기 캠페인’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건물 출입문을 통과할 때 바로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 잠시 문을 잡아주자는 것이지요. 뒷 사람이 잘 보이도록 출입문에 ‘배려 거울’을 부착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 이 캠페인 덕분인지 몰라도 출입문 에티켓을 지키는 사람이 많이 늘었지만 여전히 그냥 지나가 버리는 사람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앞만 보고 달려오는 동안 뒤를 돌아보는 여유를 잃어버린 우리 사회에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정착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해 보입니다.

 

친교적 생태영성은 배려의 차원을 지구적으로 확장해 보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물론 지구를 위한 배려는 인간에 대한 배려를 전제로 합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도 잘되지 않는데, 다른 피조물에 대한 배려를 기대하기란 어렵겠지요. 「찬미받으소서」회칙이 말하듯이 “인간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 없다면 자연의 다른 피조물과도 깊은 친교를 올바로 느낄 수 없습니다.”(91항) 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문을 조용히 여닫는 사람이 지구 공동체에 조금이라도 덜 부담을 주려는 노력을 할 수 있고, 가난한 이들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멸종 위기에 놓인 생물종들을 보호하는 일에 좀 더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우리네 마음 한편에 남을 위한 여유를 남겨 두면 좋겠습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출입문 앞에서 뒷사람을 살필 수 있는 여유, 나만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에게도 보여 주고 싶어 꽃을 가꿀 수 있는 여유, 그리고 나의 안녕을 넘어 하느님 창조 세계의 안녕도 헤아릴 수 있는 여유를 가져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넉넉한 마음의 텃밭에서 자란 꽃들을 우리집 창틀과 사무실 내 책상 위에 올려 둔다면, 그래서 그 꽃을 마주한 그 누군가의 마음이 잠시나마 밝아지고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배려의 열매’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