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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묵주


글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월간 〈빛〉 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신앙의 시작과 끝에 묵주가 함께한다. 세례를 받고 묵주를 쥐는 순간 하느님의 자녀라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도드라지고 죽어 묻힐 때 두 손에 쥐어진 묵주는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나약한 인간 육체의 간절함을 대변하는 듯 하다. 10월을 묵주 기도 성월로 봉헌하는 교회는 묵주에 의지해 삶의 우여곡절을 견디고 살아간다.

 

묵주 기도가 일상이 된 교회 안에 묵주가 흔한 것이 되어 버린 현실도 외면할 수 없다. 반지, 팔찌, 심지어 자동차 룸 미러 장식으로 사용되는 묵주를 두고 비판적인 논쟁이 일고 있는지도 한참이고 그 진부한 논쟁은 현재에도 진행 중이다. 누군가는 그렇게라도 사용되는 묵주가 가진 신앙적 상징성의 순기능을 가볍게 여길 수 없다고 말하지만 또 다른 이는 묵주 기도의 정신을 훼손하는 일이라며 거칠게 비판하기도 한다.

 

액세서리화 된 묵주를 두고 사용의 목적과 기도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데에 나는 얼마간의 냉정함을 찾는다. 묵주가 기도를 위해 소중히 사용되야 한다는 당위는 얼마든지 받아들이면서도 손과 목과 주변의 여러 곳에 묵주를 걸어 놓고 만나는 신자 한 분 한 분의 마음가짐과 그로 인한 신앙의 정서적 감흥 역시 무시할 순 없다.

 

가끔 지하철이나 버스에 오를 때 저 멀리 묵주를 손에 쥔 채 졸고 계시는 어르신을 뵈면 기도하게 된다. 또 주차해 놓은 차량 유리를 통해 어렴풋이 드러나는 묵주의 실루엣에 괜한 따뜻함을 느낄 때도 있다. 본디 상징체라는 것이 그렇다. 교회 공동체의 합의를 통해 어떤 물건이나 기호에 신앙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찾아 나서는 일이 시간의 궤적을 따라 정형화되고 다듬어지는 건 전적으로 신앙을 살아가는 신자들의 정성에 부합한다.

 

교회 안에는 수많은 상징이 있고 그것들 덕분에 우리의 신앙도 두터워진다. 인간의 인식은 상징계를 벗어나 성립될 수 없고 모든 의미의 작용은 무엇이라도 붙들고 형상화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 형언할 수 없는 신앙의 감동, 그 모든 것은 언어를 비롯한 수많은 상징으로 재편되어야 의미를 담아낸다. 말할 수 없고, 상징화할 수 없고,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신비’라는 말마디로 정리해 버리는 게으름을 반성해야 한다. 실제 육화되지 않는 모든 신앙은 그리하여 허망하다. 또 다시 묵주를 들고 생각한다. 기도할 때가 아니라 묵주를 들고 있는 이 순간, 묵주를 보는 이 순간, 마음 속 깊은 울림은 신앙의 이름으로 터져 버린다. 묵주 자체가 가지는 상징성 안에 하느님의 현존과 성모님의 간구는 이미 신앙인의 살덩이 안에 육화되어 머무른다. 묵주는 한낱 기도의 도구가 아니라 기도를 넘어선 신앙의 샘이다.

 

나는 묵주 기도를 많이 하시는 신자 분을 존경한다. 나 역시 그렇게 되기를 갈망하면서도 그렇게 되지 못한 나약한 나를 반성한다. 그러나 그보다 묵주를 바라보는 나에게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나는 묵주를 사랑한다. 묵주는 기도에 게으른 순간 엄한 선생님으로, 기도에 목말라하는 순간 따뜻한 벗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묵주는 신앙의 삶에 동반하며 나를 지킨다. 묵주 기도 성월인 10월, 그런 묵주가 더욱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