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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교의 해와 사회교리
외로움의 시대와 친교의 공동체(2)


글 박용욱 미카엘 신부|교구 사목연구소장

 

우울과 외로움

2020년 기준 OECD 회원국 가운데 우울증 유병률이 가장 높은 나라는 바로 우리나라였습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우울증 환자는 해마다 평균 6.8%씩 증가하고 있지요.

우울증은 일상에서 흔히 외로움의 감정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최근 한 연구는 50대 이상 성인 4,211명을 대상으로 12년에 걸쳐 조사한 결과, 우울증 환자의 18%가 외로움 때문에 마음의 병을 얻었다고 보고합니다. 역으로 외로움이 우울증을 키웁니다. 외로움 때문에 우울한 것인지, 우울증 때문에 외로운 것인지 따지는 것은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라는 논쟁과 비슷하겠지요. 문제는 어떻게 외롭고 우울한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정신의학과에서 받는 정신 치료와 약물 치료입니다. 선입견과 달리 요즘 항우울제들은 예전에 문제가 되었던 부작용들을 상당 부분 낮추었고 효과도 좋습니다. 이제 정신의학과 방문을 마냥 꺼릴 일만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학적 접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외롭고 우울하게 만들었던 환경 자체가 변하지 않으면 증상이 호전되도 언젠가는 다시 우울증에 빠질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의학적 접근 방법은 이미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 예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로움을 덜 수 있는 공동체가 그래서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느슨한 인간관계

사람이 혼자 산다고 모두 외로움을 겪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나타난 수많은 은수자들의 삶은 홀로 사는 것이 오히려 신앙의 신비에 몰입하는 하나의 방법임을 보여줍니다. 역으로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지요.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소외감과 상처, 배신감은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 생기는 것이니까요. 사람 때문에 상처 받고 마음의 문을 닫은 나머지 차라리 외로움을 선택한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게다가 연세 있는 분들이 어릴 적부터 형제들 사이에서 부대끼고, 또 집안 대소사를 통해 여러 가지 의무를 당연한 듯 받아들이면서 공동체 중심으로 살아왔다면, 나이가 적을수록 그런 경험이 줄어듭니다. 이제 사람들은 많은 의무와 끊임없는 비교,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관과 입장이 존중되지 못하는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당한 간격을 두고 필요할 때만 모임에 참여하는 ‘느슨한 인간관계’가 대세가 된지 오래입니다. 성당이나 기관에서도 한 번씩 모이는 일회적 행사나 봉사에는 참여자가 모이지만 정기적이며 장기간 해야 하는 일에는 손을 빌리기가 어려운 것이 그런 현실을 방증합니다.

 

 

접촉 포비아

최근에는 느슨한 인간관계에서 더 나아가 ‘접촉 포비아’를 우려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포비아(phobia)’는 공포증을 말합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의 2020년 연구 「비대면 사회의 변질: 접촉 포비아 사회, 기회와 위협」은 사람들이 비대면 접촉을 통해 편리함을 추구하던 단계에서 아예 접촉을 회피하는 접촉 포비아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고 보고합니다. 원래 이 보고서가 말하는 접촉 포비아는 코로나19 감염병으로 인한 대인 접촉을 기피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감염병 사태가 3년을 넘어가면서 무시할 수 없는 사회 변동의 한 흐름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관계를 지원해 주던 여러 가지 기술이 이제는 인간을 대체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혼자라서 외롭지만 사람들과 얽히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는 피하고 싶은 요구에 맞추어 이른바 SNS라고 불리는 소셜 미디어가 발달하고, 사람이 대면으로 하던 많은 일을 무인화 기기가 대신하게 된 것입니다.

보고서는 이런 변화가 통상/수출 및 일자리 등 경제 위축, 시장의 집중 및 산업생태계 교란, 식량 및 의료 안보, 격차/소외 및 배달노동자 등 사회문제, 알고리즘의 일자리 대체와 플랫폼 노동자 양성 등의 위협을 동반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대체하는 기술의 발달이 ‘혼자지만 외롭지 않은 삶’을 살 수 있게 해 줄까요? 적어도 현재까지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개인 간을 원격으로 연결하는 여러 가지 서비스가 실제 인간관계의 깊이를 따라갈 수 없는 점은 외로움 지수만 봐도 드러납니다. 김용섭의 저서 『라이프 트렌드 2020』에 실린 한 조사에 따르면, 외로움의 지수가 Z세대(18-22세) 48.3%, 밀레니얼세대(23-47세) 45.3%, X세대(38-51세) 45.1%, 노인층(72세 이상) 38.6%으로 SNS를 잘 이용하는 Z세대가 전 연령층에서 가장 외로움을 많이 느낀다고 합니다.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주시하면서 누군가와 소통하는 척 하지만 사실은 대화 대신 서로 독백만 주고받는 뒤틀린 관계의 실상입니다.

 

 

인간관계의 단물과 쓴물

사정이 이럴진대,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친교의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코로나19 사태 동안 교회 공동체를 떠났던 많은 이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어쩌면 ‘혼자라서 느끼는 외로움은 덜고,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는 공동체’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상상 속의 공동체를 막연히 동경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런 상상 속의 공동체에 대한 갈망이 크면 클수록, 오히려 실제 공동체에 참여할 때 느끼는 실망감과 좌절도 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 이전과 이후에도 여전히 교회 공동체에는 인간 관계가 동반된 갈등과 상처가 존재합니다. 애당초 인간관계의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회피하면서 오직 단물만 빨아 먹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생의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그 어려움 안에서 의미 있는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공동체도 그렇습니다.

 

 

함께 의미를 읽어가는 공동체

교회 공동체는 처음부터 인생의 여러 불안과 위험을 피하기 위해 모여드는 ‘안전지대’가 아니었습니다. 세상 속에서 고달픈 일을 겪더라도 교회에만 오면 그 고달픔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방공호도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오랜 기간 박해라는 외적 위협과 함께 교회 구성원들 간의 갈등과 분열도 이겨내야 했습니다. 신약 성경의 많은 서간들, 예컨대 코린토 1서가 교회 내의 갈등 속에서 일치를 호소하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는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친교의 공동체는 ‘외로움도 덜고, 스트레스도 없는 꿈의 공동체’를 찾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거룩한 공동체라고 해도 갈등과 상처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친교의 공동체는 그 갈등과 상처의 의미를 제대로 읽고 함께 대처하며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함께 의미를 읽어가는 공동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 가야 할지는 다음 호에 말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