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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動)하다
누군가에게


글 김관호 리카르도 신부|영천성당 보좌

개인적인 이유로 유치원에서 얼마간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유치원’이라는 공간에 삼십대 중반의 무뚝뚝하고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아저씨가 가는 것이 어울림의 문제를 떠나 참 죄스러운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기에 민폐가 되는 것을 알면서도 유치원에 갔다. 올망졸망한 아이들의 눈 속에 반짝이는 호기심이 나를 향했다.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아이들의 표현과 마음에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점잔을 떨며 무뚝뚝하게 있으면 안될 분위기 속에 내가 들어와 버린 것이다. 몸을 낮추고 아이들과 눈을 맞췄다. 그리고 나를 향하는 작은 손들에 내 손을 줬다. 교실문을 나서는 내게 아이들의 아쉬움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다양한 마음이 그대로 표현되고 이야기되는 그 공간이 그렇게 불편하지만은 않았다.

 

그 공간에 한참을 녹아 있다 방에 들어와 일지를 작성했다. 몇 시간에 걸친 다양한 체험이 단 몇 줄의 문장으로 정리된 걸 보면서 내가 살아가고, 만들어 가는 세상은 표현보다 그 자체만이 중요한 세상이구나 하는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사실이 만들어지기 위해 모여진 감정과 표현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사실이 중요한 일들 앞에서 감정과 표현은 전혀 쓸모 없고, 어떠한 힘을 가지지 못함을 쓰라리게 체험하면서 사실만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감정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MBTI를 물어보는 많은 사람에게 성격유형을 말하면 “신부님이 F였어요?”라며 놀라는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다. 스스로 감정적인 사람이라 생각했기에 이 놀라움은 나를 잘 모르는 사람만의 문제라고 여겼다. 하지만 한 사람만의 오해도, 문제도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했다. 절대로 감정 형은 아니라고, 검사 결과가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말들에 “아직 저를 잘 몰라서 그래요.”라고 대충 둘러댔지만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내 안의 벽은 여전히 높고 튼튼하구나.’ 하는 그런 복잡한 마음이 들곤 한다.

 

복잡한 마음을 거울로 삼았다. 마음에 없는 말을 당위와 명분으로 핑계삼아 짧게 했다. ‘예.’와 ‘아니오.’가 주는 명백과 명료의 편리함에 담긴 뜻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서운함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정말 괜찮아서, 괜찮은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괜찮지 않았던 것이다. 짧은 말의 공백이 주는 무거움과 차가움을 온전히 수많은 사람들에게 넘겨 버린 것 같다.

 

나의 마음이 담긴 감정들과 표현들이 내 입과 손을 통해 기억이 되고 삶이 되어간다. 내 삶이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따뜻함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 게 따뜻함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