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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죽음


글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월간 〈빛〉 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의 재림을 직접 경험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형제들을 두고 슬퍼하는 신앙 공동체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형제 여러분, …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말로 서로 격려하십시오.”(1테살 4,13-18) 죽는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죽음을 두고 슬퍼하겠지만 주님과 늘 함께하는 이들은 죽음을 희망의 사건으로 기억한다는 전통적 가르침에서 잉태한 말이다.

 

신앙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자 목적은 하느님과 함께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가르침에 대부분의 신앙인은 동의한다. 그래서인지 죽음을 슬퍼하거나 죽음 앞에 두려움과 불안을 호소하는 이들에게 신앙적이지 않다며 탓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럼 과연 신앙적이란 무엇일까.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감정을 추스리고 감추는 것이 신앙적이라면 신앙은 차가운 이성과 식별의 영역 안에서만 이해될 무엇이 된다. 정갈하고 정돈된 모습으로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 신앙적 자세라면, 신앙은 도덕군자의 수련이 목적이 되어 버린다.

 

예수님은 죽어 가는 인간의 자리에, 부조리하고 죄 많은 인간의 자리에 당신의 거처를 마련하셨다. 인간이 어떻게, 왜 살아야 하는지는 인간이 지향하는 삶의 목적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살아내고 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맞닥뜨리고 있는 영원한 질문 자체다. 산다는 건, 답을 찾는 일이 아니라 답이 없다는 사실을 매일 체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은 죽는다. 누구나 죽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몸은 노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죽음을 향해 묵묵히 걸어간다. 그럼에도 인간은 살아야 하는 이유의 삶의 목적에 대해 늘 묻는다. ‘왜 사는가?’라는 질문 앞에 인간은 늘 번뇌하고 갈등하며 자책과 결심을 반복하며 살아내고 있다. 살아내는 일이 꽤나 피곤한 것임에도 우리는 죽음의 문제 앞에 의연하고자 생명의 아름다움과 고귀함이 희망이라는 사실로 지금의 삶을 생명을 위한 노력의 자리로, 생명의 가치를 가다듬는 수련의 자리로 더욱 지치게 한다. 생명을 향한 안간힘의 본질은 실은 죽음이라는 삶의 방향성 안에 머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더욱 강하게 반증하는 것이다.

 

죽음을 기억하는 11월, 죽는 것을 슬퍼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기억하게 하는 일이 지금 삶의 무게를 허투루 여기는 냉혹한 가르침이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생명에 대한 갈망은 죽어가는 지금의 삶에 대한 애도에서 시작해야 한다. 죽음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대상이다. 죽음 앞에 인간은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된다. 내가 죽음을 거부하거나 죽음의 의미를 설정할 수 없다. 죽음은 그저 인간이 겨우 맞닥뜨려야 할 운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보다 생명이라는 이원론적 도식이 아니라 죽음 안에 생명이라는 십자가의 신비를 공부해야 한다. 죽음의 고통 속에서 여전히 신음하는 이들의 자리를 기꺼이 당신의 자리로 받아들이신 우리 주님의 길을 공부해야 한다. 그 공부의 길은 도처에 상처투성인 채로 널브러져 있다. 세월호, 이태원, 연평도 포격 사건, … 그리고 오늘도 우리의 집과 공장과 물건들을 만들다 죽어가는 모든 노동자의 자리에 아직 정돈되지 않은 채 널브러져 있다.

죽음의 길은 번민과 공표로 휩싸인 괴로운 길이다.(우리의 주님도 그러하셨다! 마르 14, 33-34) 그 길에서 생명의 찬란함을 이야기하기 보다 죽음의 아픔을 먼저 나누고 보듬을 형제가 우리에겐 필요하지 않을까. 다시 사도 바오로의 말을 되새긴다. “그러니, 이러한 말로 서로 격려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