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친교의 해와 사회교리
외로움의 시대와 친교의 공동체(3)
- 누구나 있는 그대로를 인정받는 공동체


글 박용욱 미카엘 신부|교구 사목연구소장

 

히키코모리에서 8050 문제까지

은둔형 외톨이는 일본에서 먼저 나타난 현상입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청소년의 ‘이지메’와 등교 거부 현상이 문제가 되고, 1990년대 중반 이른바 ‘취업 빙하기’를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히키코모리’, 즉 장기간에 걸쳐 집안에만 틀어박혀 다른 이들과 교류하지 않고 고립된 생활을 하는 젊은이 문제가 관심을 끕니다.

히키코모리 현상이 본격화된지 30여 년이 흐른 오늘날, 일본 사회는 40세에서 64세까지 중고령 히키코모리가 등장하면서 이른바 ‘8050’ 현상이 목도되고 있습니다. 8050 현상은 80대 부모가 50대 비혼 자녀와 동거하며 경제적인 지원을 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생활 형태가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은 뻔한 사정입니다. 연로한 부모가 언제까지 장성한 자녀를 돌볼 수는 없으니까요. 일본 후생성은 8050 문제가 악화되어 조만간 9060 문제까지 나타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고독사가 늘어나고, 부모의 연금과 생활보조비를 계속 받기 위해 돌아가신 부모의 시신을 유기하는 등의 극단적인 사례가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봅니다.

 

비교, 경쟁, 기대

그렇다면 이런 일들이 일본만의 현상으로 그칠까요? 일본의 사회적 병리 현상들이 우리나라에도 시차를 두고 나타난 선례가 많습니다. 은둔형 외톨이 현상도 그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일본이 먼저 겪었던 저성장과 고령화 문제가 우리나라에서도 대두되는 가운데, 은둔형 외톨이의 문제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사회적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스스로 사회적 관계를 단절한 은둔형 외톨이, 자기 뜻과 관계없이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는 독거노인, 그리고 사회관계가 없는 1인 가구 같은 ‘사회적 고립인’ 경우까지 더하면, 외롭게 단절된 생활을 하는 사람은 갈수록 더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나라에서도 2000년대 초부터 은둔형 외톨이에 관련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원인을 규명하고 대처 방법을 제안하는 논문들도 많습니다. 그 많은 논문을 읽다 보면 공통적인 단어가 몇 개 있는데 ‘비교’, ‘경쟁’, ‘기대’ 같은 말들입니다.

우리나라의 은둔형 외톨이나 일본의 히키코모리 중에는 남성이 여성보다 훨씬 많고, 또 형제 가운데 맏이인 경우가 많은 인구학적 특성을 보입니다. 아무래도 남성의 경우 여성에 비해 사회적인 지위나 성취욕 면에서 심한 경쟁에 몰리고, 비교를 당하며 높은 기대를 받는 경우가 많다 보니 그만큼 세상으로 나아가서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는데 어려움을 크게 느끼는 것이지요.

비교와 경쟁, 과도한 기대 같은 심리적 압박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예도 많습니다. 고신대 연구팀의 2019년 연구를 보면, 은둔형 외톨이 청소년의 등교 거부 이유가 학교에 가기 싫고, 밖에 나가기 싫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해서가 아닙니다. 학교에 가고 싶고, 나가고 싶고, 혼자 있기 싫지만 사회 속에서의 고통이 집안에서의 고통보다 크기 때문에 은둔을 택했다고 합니다. 부모 세대에 비해 물질적으로 좋은 조건 속에서 성장한 청소년들이 두려워 집 밖을 못 나가겠다고 말할 정도로 비교와 경쟁의 부작용이 큰 것이지요.

2021년 광주광역시 조사 결과 청년들의 은둔 생활의 주된 계기가 취업 실패로 나타났고, 대부분은 대인 관계 트라우마를 경험했다고 보고합니다. 주위의 높은 기대를 채울 자신이 없고, 끊임없는 경쟁에 지치며 늘 비교 당하느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내보일 수 없는 젊은이들이 차라리 안전한 ‘내 방’ 속에 칩거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로 존재할 자리를 잃어버린 이들, 남들의 비교 속에서 존재 가치를 계속해서 입증해야만 한다고 믿는 이들에게 있어 이웃은 경쟁 상대요 비판자 그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그런 심리적 위기 속으로 아이들을 몰아왔고, 이제 그 댓가를 치르기 시작합니다. 비교와 경쟁에서 뒤떨어질까 두려워 급기야 자기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은둔하는 이들이 앞으로 늘면 늘지, 줄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이런 현실 속에서 어떻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해답의 실마리를 옛 교회 공동체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친교의 외적인 표현, 환대

교회가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로마 시대는 철저한 신분 사회요 계급 사회였습니다. 소수의 사회적 엘리트와 서민들, 그리고 노예들 사이의 간격은 지금 보다 훨씬 넓었습니다. 교회 또한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차이와 그로 인한 갈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특히 박해 때문에 성당을 가지 못하고 교우들의 가정을 전전하며 미사를 드렸던 가정 교회 시대에는 갈등의 소지가 컸습니다. 미사 장소와 식사를 제공할 수 있는 집주인 신자와 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신자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갈등과 알력이 있었겠지요. 사람 사는데가 다 그렇듯 말이죠.

하지만 교회는 세상이 알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가 서로 다르지만 하나를 이루며 서로를 향해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 주는 친교(코이노니아)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를 믿고 증거하는 공동체로서 교회는 친교를 친목이나 사교적인 마음가짐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친교와 사랑을 마음으로만 간직하지 않고 외적으로 표현했는데 이를 ‘환대’라고 부릅니다. 로마 시대, 특히 박해 시기 동안 그리스도교 환대의 전통은 다섯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첫째, 선교사들과 이방인들을 대접하고 둘째, 죽은 이의 매장을 도우며 셋째, 박해 중에 신앙을 고백한 이들을 돌보는 한편 넷째, 죄수들과 포로들의 석방을 위해서 노력하고 다섯째, 병자들을 돌보는 일입니다. 이 다섯 가지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선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정성이 모여야 하고, 다음으로 환대를 베풀면서 그 보답을 바라지 않아야 합니다. 선교사들과 이방인, 죽은 이, 박해 받는 이들과 감옥에 갇힌 이들, 그리고 병자들은 하나 같이 환대의 댓가를 치를 수 없는 사람들이 었습니다. 지나가면 그만일 뜨내기손님들과 죽어도 자기 몸을 뉘일 무덤 조차 가지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수인과 포로의 신분을 전전하거나 병상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이 무슨 보상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함께 들으며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미사를 거행했습니다. 그리고 이 미사와 더불어 사랑의 잔치, 곧 아가페를 실천했습니다. 아가페 잔치를 위해 재산이 있는 사람들은 가진 바를 기꺼이 내놓았지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대계명은 미사를 통해서 실현되었습니다.

여기까지라면 교회가 다른 자선 단체와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 공동체에는 물질적 나눔 이외에도 특별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가페 식사에 초대받은 가난한 이들이 축복의 기도를 바치게 함으로써 누구든 각자 형편대로 이웃과 공동체, 나아가 하느님께 봉사할 기회를 준 것입니다. 재산이 있는 사람은 재산으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기도로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거룩한 교환’의 전통 덕에, 교회 공동체는 일방적으로 베푸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으로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한푼의 정성도 낼 수 없는 가난한 형제자매들도 거리낌 없이 미사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의 기도를 더 잘 들어 주신다며 그들의 기도에 의지하는 교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환대하는 공동체

오늘날 교회가 하던 많은 일이 사회 복지의 영역으로 넘어 갔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물질적 도움을 베풀고, 약한 이들을 돕는 일은 이제 국가와 다른 기관들도 함께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하든 부유하든 차별하지 않고 각자 형편대로 공동체에 기여하던, 그리하여 누구라도 공동체 안에서 자기 역할과 자리를 발견할 수 있었던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우리가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도덕적으로 흠 없는 사람들만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또 물질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공동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누구나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이해받으며 환대를 베푸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서로 비교하지 않고 경쟁하지 않으며 누구나 어떤 처지에서든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공동체, 그것이 친교의 공동체 교회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