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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글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월간 〈빛〉 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한해의 마지막 달이다. 끝이라는 생각에 왠지 무겁고 쓸쓸하다. 번듯한 결과물 없이 한해가 또 지나가서 무겁고 치열하게 살았던 지난 일 년이 과거에 묻히는 것 같아 쓸쓸하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남은 시간이 조바심으로 얼룩질 때가 많다. 이렇게 끝나선 안 된다며 서두르다 한해는 또 그렇게 끝나갈 것이다.

 

모두가 끝을 생각하는 12월에 교회는 시간의 흐름을 다르게 읽는다. 6세기 그레고리오 교황 1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대림(待臨)을 지내기 시작한 교회는 예수님의 탄생을 앞두고 한해의 끝을 시작으로 읽어 낸다. 아쉬운 끝이 아니라 설레는 시작이어야 하는 12월은 그래서 낯선 시간이다. 현실은 끝인데 머릿속 생각은 시작이어야 하는 시간의 역설을 그리스도인들은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낯선 12월의 시간 개념은 어릴 적부터 풀리지 않는 질문이었다. 학교에선 ‘유종의 미’를 이야기하는데 성당에 가면 ‘새해 인사’를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주고 받았으니 말이다. 끝과 시작이 겹쳐 있는 대림의 시간에, 끝이냐 아니면 시작이냐 똑 부러지게 말 못하는 그 대림의 시간에 나는 ‘지금이 전부’라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지나온 시간이 있는 것도 앞으로의 시간이 새롭게 펼쳐지지도 않는, 그리하여 지금이 그야말로 나에겐 전부가 되는 시간이 12월의 매 순간이 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지금이 전부가 되는 시간은 끝과 시작이 온전히 용해되어 서로의 구별이 사라진 시간이다. 끝과 시작을 따로 떼어 생각하는 건 수많은 지금을 허투루 흘려 보냈기 때문은 아닌가. 한해의 마지막에 뭐라도 쥐고 싶은 마음은 지난 일 년 동안 지금에 대한 간절함이 없었기 때문이며, 새로운 시작에 뭐라도 계획을 세우고 싶은 건 앞으로 펼쳐질 수많은 지금의 시간을 미리 재단하고 업신여기는 행동이 되지 않을까.

 

지금에 집중하는 12월을 상상해 본다.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나 앞으로의 시간을 위한 계획이 어지러이 중첩된 시간이 아니라 그저 지금이 전부이기에 조금이라도 잃어버리거나 놓아 버릴 수 없는 간절함의 시간. 후회할 여유가 없다. 오지 않은 시간에 설렐 이유도 없다. 다만 지금이 전부라 그 어떤 것보다 무겁게 다가오는 지금의 시간을 죽도록 열심히 살아내야 할 당위만이 가득한 시간을 12월엔 자주 상상해본다.

 

간절한 지금이 하루하루를 채우다 보면 아득한 태초의 시간과 장엄한 종말의 시간이 찰나의 한순간으로 반드시 맞닥뜨릴 것이다. 12월 24일의 밤, 구세사의 수많은 간절한 지금이 하나의 지금으로 결합될 것이다. 시간 속에 숱하게 뿌려 놓은 우리의 반성과 허무, 갈등과 상처, 그리고 기대와 갈망이 그날 밤 어린 생명 앞에 부질없이, 속절없이 온전히 태워져 재가 되어 남게 될 것이다.

 

이제 남은 건 하나다. 어떻게 살아왔는가, 혹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이 어린 생명 하나로 시간의 흐름을 끊어내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시다.(히브 13, 8) 시간을 두고 변하는 건 인간의 호들갑이다. 12월엔 지금의 시간 앞에 겸허하기를, 그래서 지금의 시간을 괜한 후회나 설렘 따위의 감정으로 훼손하지 않기를, 가장 조심스런 마음으로 지금을 살아내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