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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새 단장


글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월간 〈빛〉 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

 

〈빛〉 잡지는 올해 창간 41주년을 맞고 500호(2024년 12월호)를 출판할 예정이다. 저마다 새해를 새롭고 진지하게 맞이하는 요즘, 〈빛〉 잡지를 만드는 우리 직원들은 분주하다. 잡지의 겉모양도 바뀌고 필진도 새롭게 구성했으며 잡지의 몇몇 꼭지는 더 섬세하고 더 세련되게 꾸며야 하니 분주함은 때론 적잖은 부담으로 여겨질 때가 많으리라.

모진 말 갈지만 〈빛〉 잡지가 빛이 되어 교구민의 신앙에 보탬이 되길 끊임없이 바라고 바랄 일이나 책과 글을 멀리하는 요즘 잡지 형식의 인쇄 매체가 얼마나 유용할지 의구심은 여전하다. 그럼에도 잡지를 만들고 손보는 일을 복음화의 길이라 믿으며 희미하지만 명확한 하느님 나라를 잡지의 면면에 연출하고자 직원들은 오늘도 분주하다. 혹여 어느 신앙인이 일상에서 문득 〈빛〉 잡지의 한 구절을 얻어 만나 하느님을 느끼고 체험하고 살아낸다면, 그것으로 〈빛〉 잡지는 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한 것이다.

모든 글이 그러하듯 저자의 의도가 독자에게 있는 그대로 전달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독자가 살아가는 삶과 그 삶이 가져다준 수많은 지혜들 위에 쓰여진 글은 분해되고 다시 조립된다. 〈빛〉 잡지가 새롭게 단장하고 새로운 글로 독자들에게 다가선다 해도 독자의 고유한 삶 앞에 겸허해야 하는 이유다.

잡지를 통해 가르치려는게 아니라 잡지 안에서 수많은 신앙인이 삶을 펼쳐놓고 사유함으로써 제 삶을 스스로 디자인하길 겸허히 기다리는 일 또한 잡지를 만드는 이들의 몫이자 책임이다.

최승자 시인은 삶의 고통 속에 이러한 말을 남겼다.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다.”(‘20년 후에, 지芝에게’ 2016) 스스로 비관적 삶을 살아간 최승자 시인이 20년 후 미래의 누군가에게 남긴 시의 한 대목이 새로운 모습으로 〈빛〉 잡지를 내놓는 지금 마음 한 면을 깊숙이 파헤치며 지나갔다. ‘아슬아슬하게….’ 잡지가 새롭게 태어나는데 산고의 고통은 당연하며, 애정 어린 조언과 비판으로 날카롭게 다가오는 독자들의 반응을 겨우 받아내는 일도 잡지를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이다. 매호 한 권씩 한 권씩 잡지를 만드는 일은 참 아슬아슬하다.

최승자 시인이 적어 간 아슬아슬한 삶을, 그 삶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감히 상상하기는 어렵겠으나 어떤 일은 ‘아름다운 일’로 남기 위해 반드시 고통을 지나쳐야 한다는 진리는 명확하다. 삶이 아름다운 것은 좋은 일만 생겨서가 아니라 아픔 속에서도, 고통에 짓눌리면서도 아름다움을 말할 수 있는 이가 우리 곁에 있어서가 아닐까.

그리하여 〈빛〉 잡지의 새 단장은 또 한 번의 결심을 녹아낸다. 예쁘게만 꾸미려 하지 말고, 신앙생활 속 모진 십자가의 길 안에 아름다움을 발견하자는 것.

그 수많은 아름다움을 압축하고 선별해서 재창출하는 〈빛〉 잡지의 노력은 신앙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걷는 누군가의 아름다운 생각과 체험을 살며시 어루만질 수 있기를 새롭게 결심하고 다짐한다. 삶이 고단할 때 약을 찾듯 〈빛〉 잡지를 손에 쥐는 신앙인들을 상상하며 새 단장, 새 출발을 시작한 〈빛〉 잡지의 오늘은 눈물겹게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