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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사순(四旬)


글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월간 〈빛〉 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나는 산다는 것에 그리 설레지 않는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산다는 것이 살아내어야 할 숙제들을 도처에 맞닥뜨리는 일이기 때문일까. 이도 저도 아니면 이 세상 삶이 여전히 결함투성이고 완전한 가치를 실현하는 데 무능력하기 때문일까.

곧 사순(四旬)이 시작된다. 사순의 기원을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서 찾는 우리는 생명과 자유에로의 전이를 위한 과도기적 상황으로 사순을 인식하곤 한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죽음 말고 생명, 노예 말고 자유, 불행 말고 행복이라는 이원론적 도식으로 광야, 그리고 사순의 의미를 생각한다. 우리는 생명 혹은 자유에 대한 희망을 품고 죽음과 불행을 극복해야 할 무엇으로 여기며 사순의 시간을 살아가는 데 익숙하다.

단식, 금육, 절제 등의 용어에서 우리는 ‘참자, 그리고 또 참자, 부활의 그 시간까지’라는 현수막을 사순 내내 마음속에 걸어두고 다짐한다. 그럼에도 40년의 시간을, 4주의 시간을 왜 살아내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죽음과 노예, 불행에 대한 거부와 외면으로 확보할 수 없다. 죽음과 노예, 불행은 희망과 기쁨의 시간을 위한 담보물이 아니라 우리가 이 생을 다할 때까지 살아내어야 할 삶 그 자체이므로.

하여 우리가 만나야 할 사순은 다른 질문을 필요로 하는지 모른다. 가령 우리에게 죽음은 무엇인지, 노예의 삶과 불행의 시간은 도대체 어떤 것인지 먼저 묻는 게 필요하다. 사순은 부활의 생명과 자유를 위한 소모품이 아니다. 간혹 긍정적인 것에 대한 강박이 우리 삶을 옥죌 때가 많다. ‘착하게 살기’, ‘올바르게 살기’, 그리하여 ‘영원히 살기’에 대한 강박이 신앙으로 옮겨오면 ‘영원한 생명’에 반하는 모든 것에 무턱대고 맞서고 맞서다 고달프고 우울하며 스스로 죽어가는 길을 재촉하는 것은 아닌지. 삶의 진정한 가치는커녕 죽어가는 일도 감당하지 못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우리는 알기는 한 걸까.

사순은 오히려 희망을 내려놓는 연습의 시간이 아닐까. 참회와 성찰은 후에 주어질 선물같은 행복을 위한 극기와 절제의 행위가 아니다. 참회와 성찰은 잘 살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자책과 회한의 시간들에 힘없이, 처절히 머무는 것이 아닐까. 절망과 후회와 슬픔의 시간을 겨우 버텨내는 것이 사순이 아닐까. 그리하여 미래에 무엇이 주어질지 가늠조차 못하는 답답함과 우울함에 묻혀 버리는 패배의 시간이 사순이 아닐까 한다.

나는 산다는 것에 그리 큰 희망을 두지 않는다. 아니 두지 않으려 노력한다. 저 세상에서 주어질 영원한 행복 때문이 아니라 우리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아픔과 슬픔의 무게를 아직 느끼지 못하고 감히 셈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혼자서 삶의 희망을 얘기하는 것이 희망보다 절망을 사는 사람들 앞에 죄스럽기 때문이다. 아픔과 슬픔의 농도를 희망과 설렘으로 타협하고 희석하지 않으려 오늘의 사순을 온전히 겨우 살아보려 한다. 사순의 끝에 주어질 부활은 미래의 부푼 꿈을 좇는 이들의 예상치가 아니라 위대한 패배를 산 이들에게 주어지는 뜻밖의 선물이 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