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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다리
언어와 문화 속에서 발견한 복음의 씨앗(2)
- 코토다마와 애니미즘(animism)


글 이한웅 사도요한 신부|후쿠오카교구 선교 사목

 

여러분은 설 준비로 분주하시겠지만 일본은 양력 정월(1월 1일)에 신정을 지내기 때문에 매년 한국의 설 명절이 되어도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을 보내다 보니 가족과 친지들의 연락을 받고서야 구정(舊正)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추석도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는 양력 8월 15일을 오봉(技益) 명절로 지내기 때문에 추분이 가까운 시기에 달이 차오르는 것을 보고 비로소 음력을 살펴볼 때가 많습니다. 비록 명절 시기가 다르지만 일본에서도 절기에 따른 특징적인 축제(오마츠리)가 지역별로 많이 있는데, 기회가 되면 일본의 전통문화와 일본 교회의 토착화에 대해서도 나누어 보겠습니다.

지난 호에 이어 언어를 배우는 시기에 느끼게 된 일본 문화 속 말씀의 씨앗에 대해 조금 더 말씀드리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일본인들의 영적인 감각입니다. 특히 사람의 말(言) 속에도 영(雲) 혹은 혼(魂)이 깃든다는 생각은 그들 안에 심어진 일종의 복음의 씨앗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들은 말이 지닌 힘을 「코토다마(言雲 혹은 言魂)」라고 부르며, 혼(魂, anima) 혹은 기(氣)를 지닌 모든 생명과 물질, 심지어 존재하는 모든 것의 가능적 상태나 현실적 상태(energeia)마저도 코토다마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코토다마란 선한 마음에서 발하는 좋은 말은 선한 힘을 지녀 선한 결과를 초래하고, 악한 마음에서 발하는 나쁜 말은 악한 힘을 지니고 있어 악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아주 단순한 원리입니다. 하지만 이 단순한 원리는 일본의 토속신앙, 즉 애니미즘(animism)과 신토이즘(shintoism)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애니미즘의 근저에는 옛 선인들의 피조물에 대한 이해와 우주의 제현상에 대한 영적 통찰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범신론(pantheism)이나 다신교의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있는 애니미즘을 무조건적으로 긍정할 수는 없지만 우주가 다양성 안에서 일치하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혼(anima)을 지닌 모든 피조물(물질, 생혼, 각혼, 영혼)이 유기체적 상호 관계 속에 있다는 애니미즘의 바탕을 이루는 세계관은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 15)는 주님의 말씀과 상치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생태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조화를 강조하는 통합생태론(integralecology)을 제안하셨는데, 애니미즘이 내포한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하는 세계관은 현대 교회가 성찰하는 시대의 징표와도 일부 상응하는 부분이 있다고 느껴집니다. 특히 하느님 모상(imago Dei)인 인간의 영혼이 부여받은 말이 혼을 담고 있으며 피조물 안에서도 코토다마로 작용해 큰 영향을 미친다는 애니미즘적 통찰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감각을 통해 볼 때도 존중할만한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됩니다.

어학원에서 처음으로 코토다마에 대해 알게 됐을 때 유사과학이나 일종의 미신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성사를 이루는 형상(forma)이 말씀(logos)에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코토다마라는 생각 자체가 결코 터무니없는 미신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은 문화를 반영하고 문화는 민족의 얼을 반영하며 그 속에는 음이든 양이든 그들의 영성이 깃들기 마련입니다. 코토다마라는 것이 근현대에 들어 돌연히 생겨난 뉴에이지적인 사상이 아니라 고대에서부터 전래되어 온 일본의 토속신앙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감안하고, 그것이 신앙의 눈으로 볼 때 복음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면 그 바탕을 이루는 애니미즘 사상과 더불어 단지 원시적인 종교나 미신이라고 해서 무조건 배척하기 보다는 하느님께서 한 민족의 문화 속에 심어 주신 말씀의 씨앗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Magnificat ‘Anima’ mea Dominum, et exultavit ‘Spiritus’ meus in Deo salutari meo…,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 우리가 저녁기도 때마다 부르는 복음 찬가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의 첫 구절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수태고지를 받고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기뻐하며 찬송했는데, 영(spiritus, pneuma)으로서만이 아니라 혼(anima, psyche)으로서도 기뻐하고 찬송했다는 대목이 제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새 하와로서 모든 피조물을 품은 채 모든 피조물을 대변하여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기뻐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성모님의 노랫말은 신약의 아름다운 베라카가 되었습니다. 사람의 말로써 하느님을 찬양하는 구약과 신약의 베라카가 우리 영혼의 구원에 있어서 결코 무력하지 않듯이, 사람의 말은 생명을 지닌 모든 피조물과 현상에 있어서 결코 무력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생명을 북돋우는 힘이 있습니다.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로마 8,19-21)

현재 제가 근무하고 있는 유치원의 아이들은 등원 후 아침기도를 마치면 매일 코토다마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심은 작은 식물과 야채들에게 “고마워”, “예쁘다”, “훌륭해”, “소중해”, “건강히 잘 자라렴” 등 좋은 말을 건네며 정성스레 물을 줍니다. 신기하게도 아이들의 예쁜 말을 듣고 자라는 식물들은 보다 생생한 빛깔을 띠며 마트에서 파는 야채보다 싱싱하고 건강한 맛이 납니다. 선한 말을 하는 아이들의 얼굴(얼이 깃드는 그릇) 또한 더 밝아지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진심에서 우러나는 사람의 선한 말은 생명을 살리는 창조의 힘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 성탄 대축일에 봉독되는 요한복음의 서두 로고스 찬가에서는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천지창조를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모상으로서 지닌 사람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인 말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 창조사업에 협력하고 서로 생명을 북돋우는 그리스도 신앙인으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