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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칼럼
“흙과 먼지”


글 정태우 아우구스티노 신부|이곡성당 주임

 

팬데믹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여 말하는 일이 잦아졌다. “코로나 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그때는 아직 코로나 전이었으니까….” 그만큼 이 전염병 사태 때문에 우리 삶이 많이 바뀌었다는 뜻이겠다. 변화가 사회 전반에 걸쳐 있고 또 되돌리기 어려운 것들이라서 다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당황스럽고 적응하기 어려운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 변화 중 하나가, ‘시간이 모자란다.’고 하는 느낌이다. 해야 할 일이 늘어난 것도 아니고 한 달의 날짜 수가 줄어든 것도 아닌데, 일정은 자꾸 겹치고 약속은 미루게 된다. ‘어째서 이렇게 바쁘지?’ 하고 자문하게 되는 것이다. 한참 동안 나다니지 않고 사람을 만나지 않았던 타성이 원인일까? 아직 잘 모르겠다.

해가 바뀐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사순절이 다가왔다. 물론 올해 부활이 빨라서 그런 것이지만, 코로나 후유증인 이 ‘바쁜 마음’과 겹치게 되니 정신없이 닥쳐온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차분하지 않을 때야말로 흔들림 없는 신앙의 은혜가 간절하다.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조용히 빛나는 감실의 성체등을 바라보고 있자면, 곤두서 있던 신경이 가라앉는다. 아니,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먼 길에 지친 나그네가 변함없이 반겨 주는 고향에 돌아온 심경이 이런 것일까? 그러고 보면,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 모른다.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 우리는 머리에 재를 얹고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하는 사제의 엄중한 말씀을 듣는다. 이 구절은 창세기에 나오는 것으로, 하느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벌을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그 원본이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 흙과 먼지는 인생의 유한함과 죄의 비참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또 한편 영원한 고향이 따로 있다는 것을 깨우치는 상징이기도 하다. 한 줌 재에 불과한 나를 하느님께서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 나를 기다리시는 하느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구세주께서 나타나시기 전에는 우리의 인생에 평안과 휴식은 없었다. 허무에서 나와 무상한 변천 속을 잠시 헤매다가 다시 허무로 돌아갈 뿐, 그 애처로운 허우적거림에 무슨 의미나 보람이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영원하신 분께서 이 조그마한 흙덩이를 어째선지 사랑하셨다.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으시기까지 하셨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덕분에, 하느님의 벌을 짊어지고 있던 우리 육체가 예수님과 하나 되는 영광을 입은 육체로 바뀌었다. 여전히 흙이고 먼지이지만, 여전히 시달리고 피곤하고 괴로움을 겪지만, 더 이상 허망하거나 비참하지 않다. 더할 수 없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승의 삶은 찰나지간이지만 우리를 창조하신 분께서는 영원하시고, 그분의 사랑은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으신다. 그러니 세상이 어찌 변하든 걱정할 필요가 없고, 다만 돌아가야 할 고향 집을 기억하면 되는 것이다. 지쳐서 힘이 들 때, 우리를 위로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자.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