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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으로 배우는 분석 심리학
예수님이 보여 주신 리더십(2)


글 이나미 리드비나 교수|서울대학교병원 공공진료센터 교수

 

사랑의 예수님이시지만,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시고(마태 21,12; 마르 11,15; 루카 19, 45-48; 요한 2,13-17) 환전상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이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을 때의 모습이 어쩌면 그런 상황을 막고 다시 평화로운 공동체를 회복하는 열쇠가 아닐까 싶습니다. 네 복음서에 이렇게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광경은 많지 않습니다. 성전을 다시 되살리라는 예수님의 메시지가 그만큼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성전은 기도하는 곳이지, 상인과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서는 안된다.’라는 예수님의 일갈을 성경은 아주 중요하게 기록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침략한 로마인들과 왕, 귀족들의 억압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아무리 일해도 병들고 가난해지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성전에서 물건을 내다 파는 이들 역시 돈 몇 푼이라도 벌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쩌면 바로 그런 소소한 이기적인 선택들이 모이다 보면 우리 공동체 전체가 타락할 것이라고 예견하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환전상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이들의 의자를 뒤엎으셨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로마에서 주조한 화폐들의 유통은 이스라엘 민족들을 점점 더 가난하게 만들면서도 물질주의로 흐르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비둘기나 화폐는 개방, 세계화, 자유 경제와 무역 등을 상징하는 표상들이었던 것입니다. 기도와 성서읽기로 성스러워야 할 성전을 이런 것들로 오염시킨 사람들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현대 우리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비유나 가르침을 알아들을 귀와 머리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신들의 분노와 좌절을 진실과 도덕적 삶을 가르치는 예수님에게 투사했습니다. 예수를 질투하는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열혈당, 로마와 이스라엘의 관료들, 왕족과 귀족들은 무지몽매한 대중들을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부추겼습니다. 당시의 불의와 불공평한 사회의 모순들을 예수라는 인물을 죽임으로써 은폐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아닐까요. 중세에서 근세까지 계속되었던 마녀사냥이 당시 부패한 지도층들에 대한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렸던 장치였던 것과 마찬가지였겠지요. 각성하지 못했던 대중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면서 어리석은 군중심리에 휘둘리게 됩니다.

이 시대에도 불행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시스템을 정의롭게 차근차근 정비하는 대신 누군가에게 죄를 물으면 마치 자기들의 책임은 다한 것처럼 착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권력의 사주를 받는 검찰, 경찰, 군대 등 총칼을 가진 이들이 공포 정치를 하게 되는 기저 중 하나이지요. 하지만 구조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는 보통 사람들은 가짜 지도자들에게 세뇌되어 우상을 섬기면서 살게 됩니다. 명철한 이성과 따뜻한 사랑으로 힘든 이웃을 포용하는 대신 ‘누군가를 감옥에 넣어라, 사형시켜라.’ 같은 살벌한 언어들만 난무하면서 출구를 찾지 못하는 답답한 사회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를 죽인 유다인들과 우리가 같은 이유입니다. 꼭 몇몇 정치 지도자들만의 문제라고 단순화하는 것도 현명한 태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어쩌면 평범한 우리 역시 알게 모르게 우리보다 약한 자들을 무시하고, 경멸하고, 함부로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나만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가해자라고 손가락질하고 있다면, 자신을 성찰하고 돌아보기 보다는 일단 남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아주 미숙하고도 이기적인 사람들로 가득한 사회가 아닐까요. 내가 누리는 행복과 즐거움은 당연한 것이고, 다른 사람의 불행과 고통은 나 몰라라 하는 그런 도시가 바로 소돔과 고모라 아닐까요. 약한 사람, 힘든 사람을 보호해 주어야 할 크고 작은 지도자들이 각자도생, 적자생존 법칙, 우월한 유전자 같은 말들만 입에 담으면서 힘센 사람에게는 더 힘을 보태어 주고 약자는 더 약하게 만들고 있다면,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별다른 보호장치도 없이 사는 이들은 얼마나 불안하고 공포스러울까요. 그리고 그런 이들이 많은 사회가 과연 부자들에게 안전할까요. 강도당할까 봐 개인적으로 총을 사고, 보초를 세우고 담벼락을 높이는 미국, 필리핀, 중남미의 부자들만 봐도 그런 위험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우리 모두에게 큰 재난이 되는 선택인지 자명해 보입니다.

 

가장 약하고, 가장 아프고, 가장 헐벗은 사람을 도와 주는 것이 곧 나를 돕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 상상해 봅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좋은 유전자, 편안한 성장 과정과 교육 환경, 훌륭한 스승과 제도 덕으로 성공했으면서도 마치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모든 것을 일군 줄 착각하는 “능력 제일주의”를 외치는 냉혹한 현대인들과 비교가 됩니다. 굳이 왜 나를 비천한 것들과 비교하냐며, 자신은 태생적으로 다른 사람이라고 강조하는 이들도 한 번 떠올려 봅니다. 그들의 생각이 아무리 비합리적인 착각이라고 말해 봐야,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층이나 상류층 사람들처럼 전혀 인정하지 않겠지요. 성전에서 화를 내시던 예수님의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이해가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며 “다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생명을 바쳐 무지한 우리를 가르치셨던 예수님의 선택은 여전히 제대로 알지도 닮을 수도 없는 신비의 영역인 것 같습니다. 참된 지도자와 지혜로운 스승의 모습을 우리에게 철저하고 명확하게 보여 주셨지만, 끝내 제대로 이해하지도 실천하지도 못하는 못된 우리의 한계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