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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다리
느림 속에서 발견한 내적 풍요로움


글 이한웅 사도 요한 신부|후쿠오카교구 선교 사목

 

2024년도의 시작을 알리는 3월이 되었습니다. 일본은 3월이 연도 말이라서 한국과 달리 2023년도를 마무리하느라 분주합니다. 해가 거듭될수록 사회가 급변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하지만 예전과 같은 미니멀한 삶의 ‘내적 풍요로움’은 현대사회가 추구하는 신속함과 편리함 속에 매몰되어 간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에 대한 반향 때문인지 한 때 ‘응답하라 1988’ 등 감성 콘텐츠가 유행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신속함과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작금의 분위기와 걸맞지 않게,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을 고집하는 독특한 사회가 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매뉴얼과 신중함을 고집하는 일본사회에 살면서 느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어볼까 합니다.

 

일본에서 살다 보면 관공서나 기업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아날로그 방식을 더 중요시하는 모습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혹자는 버블 붕괴 이후 일본의 저성장이 옛 방식을 고집하는 비효율성에 있다고 비판하며, 이에 대해 ‘잃어버린 20년’이라고 풍자하기도 합니다. 한국은 어딜가나 와이파이를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이지만 일본은 근래에 와서야 무선 인터넷 환경이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며, 아직도 ‘가라케’라고 불리는 소위 피처폰을 사용하는 분이 많습니다. 전자결제가 보편화 된 한국과는 달리 아직까지 전자 결제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가게들이 많아 현금을 늘 가지고 다닙니다. 일본인의 성향 자체도 빠르고 효율적인 일처리 보다는 ‘꼼꼼히 신중하게’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제로 일본의 사목현장에서 새로운 것을 기획하고 실행하려 하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수년 전 제가 후쿠오카 주교좌 성당의 보좌신부로 지낼 때 기존에 없던 새로운 액션단체를 발족한 적이 있었는데, 수많은 회의를 거쳐 규약과 회칙을 비롯한 활동 매뉴얼이 정해지고서야 겨우 첫 활동에 들어갈 수 있었고, 본격적으로 활동하기까지 결국 반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인쇄된 자료’는 회의뿐만 아니라 강의 때도 필수입니다. 종종 미션 스쿨과 대학교에 강의를 가는데,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준비해 가는데도 학교측이 굳이 자료를 인쇄하여 학생들에게 배부하는 모습에 놀랄 때가 있습니다. 또한 본당의 회계 출납부도 수기로 작성하며, 교구로 문서를 발송할 때에도 우편이나 팩스를 이용합니다. 유치원 업무도 마찬가지로 현에 제출하는 서류 대부분을 수기로 작성하여 우편으로 발송합니다. 덕분에 서재는 늘 수많은 문서 파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신속함과 편리함을 좇아 살아가는 것에 익숙했던 저에게 ‘매뉴얼과 신중함’을 중요시하고 아날로그 방식을 선호하는 그들의 성향이 답답하게 느껴진 적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느리고 비효율적인 생활양식 안에서 디지털 문명에 의해 잊혀진 가치를 발견할 때도 있습니다. 매년 새해에 어김없이 발송되는 수많은 연하장을 받을 때, 이메일이나 메신저에서 찾을 수 없는 사람의 온정을 느낍니다. 저 또한 신세를 진 분께 감사의 뜻을 담아 편지를 쓸 때, 글을 다듬으며 한번 더 상대방을 지긋이 생각하게 됩니다. 시내 버스를 탈 때 매뉴얼에 따라 급정거하거나 급발진 하는 일없이 승객이 안전하게 자리에 앉을 때까지 출발을 기다리는 운전기사의 모습을 보며, 빨리 가는 것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친절함을 느낍니다. 전차가 출발하기 전 위험요소가 없는지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가리키며 안전을 확인하는 역무원을 볼 때, 작은 일에도 신중한 모습에 감동을 느낍니다. 출퇴근길, 대부분의 차량들이 규정 속도를 지키며 경적을 울리는 일없이 양보하며 달리는 모습을 볼 때 저도 덩달아 차분히 운전하게 됩니다. 수기로 문서를 작성하고 인감을 찍을 때, 시간과 정성을 들여 작성한 문서에 대해 책임감을 더 느끼게 됩니다. 본당에서 새 단체를 발족하여 활동을 개시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시간과 정성을 기울이는만큼 자신이 하는 봉사직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신자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쩌면 비효율적인 일본의 아날로그 문화 안에서, 빠르고 편리한 디지털 문명에 의해 잊혀져 가는 정갈함과 세심함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일이 진행되는 속도는 느리지만 많은 시간과 노력과 정성을 들이기에 작은 일 하나하나가 더 큰 의미를 지닐 수 있지 않을까요.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많은 것들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초고속 사회를 살아가는 오늘날, 어쩌면 편리함과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세상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마저도 인스턴트화 되어 가는게 아닌가 성찰할 때가 있습니다.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 안에서 인간의 노동 또한 그 참된 의미가 퇴색되어 가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할 때가 있습니다. 일본에서 겪은 일종의 불편함은 저에게 외적인 풍요로움 속에 잊혀져 가는 ‘내적인 풍요로움과 느림의 미학’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 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24년도가 시작됩니다. 여러분들이 하시는 모든 일이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더 풍요로워지길 바라며 기도하겠습니다.

* 추신 : 후쿠오카교구에 파견된 선교 사제 정원철 마르첼로 신부가 현재 후쿠오카교구의 전산화를 위해 진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