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복음 나누기 7단계와 주일 복음 묵상
복음 나누기 7단계와 주일 복음 묵상


박광훈 신부, 윤주현 신부, 김창현 신부, 반 유딧 수녀

 매주 하는 복음 나누기 7단계

 

1.주님을 초대한다.

“기도로 이 자리에 예수님을 초대해 주십시오.”

 

2.말씀을 듣는다.

“ ― 복음 ― 장을 펴 주십시오. 어느 분이 ― 절부터 ― 절까지 읽어 주십시오.”

(다 읽고 난 후 잠시 침묵한다.) “다른 분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십시오.”

 

3.복음말씀을 마음에 새긴다.

“각자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짧은 구절을 선택하여 큰 소리로, 기도하듯이 세 번씩 읽어 주십시오. 읽는 사이에는 잠시 침묵을 지켜 주십시오.” “어느 분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십시오.”

 

4.침묵 중에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

“3분 동안 침묵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듣도록 합시다.”

 

5.마음 안에 들려온 말씀을 나눈다.

“이제 각자 주님께로부터 들려온 말씀을 함께 나눕시다. 왜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와 닿았는지,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6.모임에서 해야 할 활동에 대하여 토의한다.

“지난 번 모임에서 결정했던 사항을 어떻게 실천했는지, 그 결과와 개선해야 할 사항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이번에는 어떤 활동을 하는 것이 좋을까요?” “우리 주위에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7.자발적으로 함께 기도한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자유롭게 기도합시다.”

 

 

 

3월 5일 사순 제1주일 : 마태 4,1-11.

글 박광훈 안드레아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대신학원 양성자

1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2 그분께서는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시장하셨다.

3 그런데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5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성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6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7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8 악마는 다시 그분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9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1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11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이 복음을 묵상하고 있는 지금, 저는 신학생들과 한티영성관에서 한 달간 영성수련 동반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침묵 안에서 말씀과 함께, 말씀을 읽고 듣고, 말씀을 살아가는 이 순간이 더 없이 행복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광야에 계십니다. 광야는 시련과 어려움과 고통의 장소인데 왜 예수님께서 그런 광야로 간 것일까요? 복음은 정확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로”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갔습니다. 하느님께서 지금 예수님을 광야, 고통과 시련과 어려움의 장소로 데려가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은 40일 동안 단식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지쳐 있을 때, 가장 힘들 때, 가장 배가 고플 때 악마는 예수님에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뿌리치기 힘든 세 가지 큰 유혹을 합니다.

악마가 시도한 이 세 가지 유혹은 모든 사람들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는 것들입니다. 돌로 빵을 만들라는 첫 번째 유혹은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 시도한 것처럼 악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먹고 사는 문제에 집착하게 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 집착하게 만들기 위해서 아무 가치 없는 것에 사람의 모든 정열과 힘과 관심을 쏟아 붓게 만드는 것이 악마가 사람들에게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누군데 이렇게 초라하게 먹고 살아서야 되겠느냐 라는 유혹을 하는 악마는 사람으로 하여금 잘 먹고 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두 번째 유혹은 자존심과 위신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 시도한 것처럼, 악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자존심과 위신, 명예에 지나치게 집착하도록 만듭니다. 나를 내세우고 내 자존심을 지키고 내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모든 방법을 동원하도록 만드는 것이 악마가 사람들에게 시도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악마는 우리 자존심에 상처가 나는 것을 조금도 허용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내가 이런 꼬락서니를 당해서야 되겠는가? 내가 누군데 나를 건드려? 감히 나를 어떻게 보고?’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악마는 사람으로 하여금 내 자존심이 상한 것을 되갚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를 과시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악마에게 엎드려 절하라는 세 번째 유혹은 세상의 모든 권력과 영광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 시도한 것처럼, 악마는 모든 사람들에게 세상의 권력과 영광을 얻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시도하게끔 유혹합니다. 세상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악마에게 머리를 숙이고 굴복하는 일, 세상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 어떤 악한 일이라도 서슴지 않게 행하도록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유혹들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유혹을 무엇으로 물리치셨는가? 바로 성경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신 것입니다. 유혹자가 유혹할 때마다 성경의 말씀을 기억하셨고, 그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신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이 예수님을 유혹으로부터 지켜내는 방패막이가 된 것입니다. 악마의 유혹을 반드시 이기겠다는 인간적인 결심이나 욕심으로 유혹을 이기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항상 함께 있음을 온 몸으로 증언하셨습니다.

악마가 하는 유혹들은 지금 바로 우리에게, 우리 식구에게, 우리 이웃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일들입니다. 유혹이나 악습을 자신의 의지만으로 반드시 끊겠다고 욕심을 부리는 것, 나약한 인간이 빠질 수 있는 가장 큰 유혹입니다. 그런 욕심으로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긴다 하더라도 자기 만족이라는 더 큰 유혹의 노예로 전락할 뿐입니다. 어떤 유혹에 사로잡힐 때, 그에 적합한 주님의 말씀을 믿고 생각하면서 그저 하느님과 함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어느새 유혹에서 자유롭고 홀가분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3월 12일 사순 제2주일 : 마태 17,1-9.

글 윤주현 베네딕토 신부 | 가르멜 수도회 한국관구장

1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2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3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4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5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6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8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

 

오늘은 사순 제2주일입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대축일을 앞두고 회개와 보속을 통해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며 부활을 준비하는 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순절은 주님의 뒤를 따르는 그분 제자로서의 우리들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새롭게 살도록 해줍니다. 오늘 복음인 마태 17,1-7은 통상 예수님의 ‘성변용(聖變容)’이라 불리는 사건입니다. 성교회가 이 이야기를 사순 2주일에 전하는 것은 남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 중에 일어났습니다. 이 일화가 소개된 복음서의 앞뒤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장차 당신이 붙잡혀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리라는 세 번의 예고, 그리고 당신을 따르기 위한 제자들의 태도에 대한 훈계가 함께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는 지금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며 인류의 구원을 위한 수난과 죽음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 역시 그런 당신의 운명에 동참하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오늘 주님은 그렇게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위해 특별한 선물을 준비해 주십니다. 주님은 당신이 아끼던 제자들을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영광스럽게 변하시며 그들에게 당신의 진면목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당신의 본모습, 즉 하느님이신 당신의 모습을 그들에게 계시하신 사건입니다. 또한 수난과 죽음 이후 당신이 장차 어떻게 되실지 미리 그들에게 보여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십자가의 여정을 향해 나아가는 제자들, 잠시나마 스승의 수난과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어려움 중에 있게 될 그들이 그 모든 험난한 여정을 잘 견디어 내는 가운데 인류 구원을 위한 초석이 될 수 있도록 위로와 격려를 더해 주십니다. 영광스럽게 변모되신 예수께서는 모세, 엘리야와 함께 담소를 나누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예언자가 주님 곁에 계신 것은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가 고대해 온 바로 그 메시아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바라보며 제자들의 맏형인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다른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다고, 그리고 그분들과 함께 머물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같은 일화를 전하는 마르 9,6에 따르면, 사실 베드로는 겁을 집어먹어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런 베드로의 청원은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우리가 청해야 할 것은 우리 내면의 산에 주님을 위한 거처를 마련하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 안에 머물며 사랑의 친교를 나누려 하지만, 우리 마음 안에 그분이 머무실 자리, 그분의 거처를 준비해드리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자유로운 응답과 협력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우리는 그분께서 머무실 자리를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마련해 드려야 합니다.

또한 그런 주님과 우리들을 향해 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은 우리들이 주님의 제자로서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잘 알려 줍니다. :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성부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그분께서 이끄시는 대로 잘 따르는 겁니다. 바로 거기에 우리의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순 2주일 복음 묵상을 마무리하며,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이 머무실 거처를 마련해 드리며 그 안에서 그분과 함께 머물고 그분과 사랑을 나눠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며 그분의 뜻을 헤아리는 그분의 진정한 제자로 거듭나야겠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분명 우리도 당신처럼 영광스럽게 변모시켜 주실 것입니다.

 

 

 

3월 19일 사순 제3주일 : 요한 4,5-15.19ㄴ-26. 39ㄱ.40-42.

글 김창현 베드로 신부 | 죽전성당 보좌

5 그렇게 하여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시카르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르셨다.

6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7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8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에 가 있었다.

9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10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11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

12 선생님이 저희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까? 그분께서 저희에게 이 우물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물론 그분의 자녀들과 가축들도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다.”

13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15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19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

20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21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22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23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24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25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하였다.

2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39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 여자가 “저분은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혔습니다.” 하고 증언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40 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이틀을 머무르셨다.

41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

42 그들이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

 

지난 1월 본당 청년들과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으로 피정을 갔었습니다. 둘째 날 아침, 사정이 생겨 일찍 본당을 향해 나서다가 우연히 출입구에서 한 글귀를 마주했습니다. “갈증을 풀어 주고도 고맙다는 말을 듣지 않는 샘물이 되어라.” 바쁘게 나서면서도 너무나 좋았던지라 사진까지 찍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21세기는 영성의 시대라는 말이 부쩍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물질문명이 더욱 발전될수록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이 충족됨으로써 그동안 가려져 있었던 영성의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는 예수님에 관한 말씀이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나누는 긴 대화 속에 많은 상징들이 있지만, 저는 그 가운데 ‘갈증’이라고도 할 수 있는 ‘목마름’에 대해 더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누구나 온전히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 영원한 그 무언가에 대한 목마름에 대한 체험을 겪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유다인에게 상종할 가치조차 없는 완전히 배제된 사람이었으나, 예수님께서는 먼저 말을 건네십니다. 여인이 간직한 영적인 목마름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영적인 목마름을 채워주시고자 예수님께서 먼저 가까이 오십니다. 그리고 그 목마름은 반드시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 안에서 채워질 수 있으리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즉 우리 일상을 영적인 차원과 늘 연결지어 봉헌하며 사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도, 기도도, 봉사도 우리 삶과 연결되지 않으면 살아있는 예배가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영성이 스며든 일상은 자신을 풍요롭게 하고, 다른 이들의 목을 축이게 하는 또 다른 샘물이 됩니다.

생명의 물을 주시겠다는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니, 십자가에 못 박힌 채 매달려 계신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목마르다.” 그분은 우리의 목마름을 채워주시기 위해 스스로 목마름을 택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라는 샘에서 목을 축이신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생명을 누리셨고, 그 생명을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의 목마름을 생명의 물로 채우고, 사마리아 여인처럼 예수님을 통해 다른 이들의 갈증도 풀어주라고 말입니다. 누군가에게 샘물이 되어 준다는 것은 예수님의 목마름을 채워주는 위대한 일입니다. “너희는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다.” (마태 25,35)

 

 

 

3월 26일 사순 제4주일 : 요한 9,1-41 또는 9,1. 6-9. 13-17. 34-38.

글 반 유딧 수녀 | 툿찡포교베네딕도회 대구수녀원, 대구가톨릭어버이성경학교

1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6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7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8 이웃 사람들이, 그리고 그가 전에 거지였던 것을 보아 온 이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이가 아닌가?”

9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이오.”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아니오. 그와 닮은 사람이오.” 하였다. 그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13 그들은 전에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바리사이들에게 데리고 갔다.

14 그런데 예수님께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날은 안식일이었다.

15 그래서 바리사이들도 그에게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다시 물었다. 그는 “그분이 제 눈에 진흙을 붙여 주신 다음, 제가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6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하여, 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

17 그리하여 그들이 눈이 멀었던 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다.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34 그러자 그들은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오?” 하며, 그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35 그가 밖으로 내쫓겼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시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36 그 사람이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자,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38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 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9,5)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을 볼 때마다 ‘시각장애인들은 얼마나 답답할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과연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얼마나 될까? 그것은 격차의 수치를 낼 수 없는 마치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겠지요. 그러나 누가 보고, 볼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람에게는 육신의 눈과 함께 영적인 눈도 있어 육신의 눈이 밝아도 영적 세계를 볼 수 없고, 육신의 눈이 어두워도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영안을 지닌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거기다가 하느님의 나라는 육신의 눈으로가 아니라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신비의 영역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동행하는 인생이란 길에는 보는 사람과 보지 못하는 사람이 함께 손을 잡고 가기에 오해와 시기, 욕망과 탐욕이 어우러진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전 문맥(8,12-47)에 이어지는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5절; 8,12)라고 말씀하시며, 표징을 통해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으로 죄와 징벌을 연관하여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스라엘에서도 나환자나 눈먼 사람은 죄의 결과로 하느님으로부터 응징의 벌을 받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2절; 참조 34절) 그러나 예수님께서 병은 누군가의 죄에 대한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3절) 성경 안에서 치유의 은혜는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지지만,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에게 친히 자비의 손길을 펼치시며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십니다.(6-7절)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하던 눈먼 이는 자신의 전업을 멈추고 누군지도 모르는 한분의 말씀과 행위를 수용하며 진흙을 개어 바른 자신의 눈을 실로암에 가서 씻었습니다.(11-12절)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없으면 상대방의 말을 받아들이거나 그의 말에 따라 행동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눈먼 이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행동했다는 것은 그가 준비된 사람,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이었음을 시사합니다. 치유 이후에 그는 자기 자신의 신원을 명백히 하며(9절; 25절), 예수님을 ‘예언자’(17절)로,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분임을 확언(30-33절)하는 한편, 주님을 믿었습니다.(38절) 이제 그는 눈먼 이가 아니라 ‘실로암’에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 온 사람”, 곧 보고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36절) 보고 믿는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도 자신의 신앙체험과 믿음을 전하는 표징으로서 ‘파견된 이’가 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눈먼 이의 치유를 보고도 ‘하느님의 일’로 받아들이기보다 ‘안식일’이라는 법에 묶여 사랑과 섭리를 보지 못하는 눈먼 이로 머물고 있습니다.(16절) 이렇듯이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이 먼 사람은 표징을 보지 못하고, 보지 못하기에 믿지 못하는 사람으로 남아서 하느님의 섭리와 영광에 의혹과 불신만을 제기할 뿐입니다.(18-34절)

우리의 일상 안에서 나의 신앙을 묶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빛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나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여나 우리가 너무나 잘 보고 알고 있다고 하기 때문에, 오시는 그분을 빛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어둠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요? 내가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빛 한가운데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우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을 뿐 아니라 구원으로부터 더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보지 못하면서도 보는 척을 하고,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척을 해야 잘 살 수 있다고 믿는 세상의 한복판에서 이제 그만 눈의 허물을 벗겨내고 진실한 나를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본다’고 고집할 때 우리는 빛을 앞에 두고도 어둠 속을 헤맬 것입니다.(참조 41절)

주님께서 나의 참 빛이심을 고백하며, 제2독서의 말씀을 거듭 마음에 새겨 봅니다. “우리는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둠의 일에 가담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십시오.”(에페 5,7-11)